회사 생활을 오래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이 있다. 퇴근 후 업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자주 실패하곤 한다. 그날 업무를 껌처럼 씹어서 입천장에 붙인 채로 집에 가져간다. 그리고 내가 저지른 일들을 떠올린다. 징그러워.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다음날 해야할 결정과 일들을 예측해본다. 어떤 사람은 퇴근하고 회사 일을 지운다던데, 나는 왜 퇴근 이후의 저녁으로 넘어가지 못할까. 이건 순전히 일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일에 대해서는 겁많은 완벽주이자인것 같다. 퇴근 후 1시간 되돌아보는 일은 나에게 이미 루틴이 되었다.
나는 속으로는 경우의 수를 만나고 보관해두지만, 바깥으로는 양반처럼 꽤 점잖게 의사결정을 하되, 그 결과가 포청천처럼 그럴싸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포청천은 93년도에 제작된 대만 드라마로, 포청천 판관의 특징은 이마에 반달 모양의 문신이 있다. 문신인지 점인지 모르겠다. 그는 복잡한 사건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며, 주로 악인에게 '개작두를 대령하라'는 결말로 끝이 난다. 고전적인 처형 기법이다. 그러나 개작두는 작두의 기능을 잘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거부감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작두를 대령하는 깜냥이 안된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바깥 양반이었다. 일찍 독립을 했고 월세를 내기 위해 닥치는대로 일했다. 나는 집안 일을 제대로 운영하는 안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1인 가구로써 안사람으로만 살 수 없었다. 나의 바깥은 어느때는 혼돈이었고, 그때 안사람은 바깥 양반을 관리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설거지나 청소를 지시하는 일도 잘 할 수 없었다. 물론 안과 바깥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는 것은 아니지만. 두 양반이 서로 잘 영위하기 위해서 협력을 하기는 어려웠다는 의미다. 때로는 바깥 양반이 힘들면 안사람이 영향을 받아 휴식기에 들어가기도 했다.
회사 전사 연수때 상급자들은 직원들에게 소개와 인사를 하고, 시작을 알렸다. 응원하느라 목이 쉴 지경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목소리가 크지 않다. 그때 나는 안사람을 좀 더 신경쓰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은 양고기가 맛있었다. 우리팀을 포함해서 6명이 앉은 자리 건너편 벽에는 칸딘스키 그림이 걸려있었다. 음악처럼 흐르는 칸딘스키 그림이 액자 안에서 얌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양고기를 한 입 먹고 그림을 봤다. 두 번째는 사과케일주스와 양고기를 국산 소금에 찍어 먹고 그림을 봤다. 칸딘스키 그림은 왜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기본적으로 인식하는, 대상의 모양새로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가지고 있는 단면들 중에 몇 가지, 색감과 구조 등으로만 인식하게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보통 토끼라고 하면 토끼의 형태만 드로잉해도 토끼로 인식할 수 있다. 나에게 토끼를 그리라고 하면 긴 귀나 한쪽이 접혀진 귀의 토끼 형태를 그릴 것이다. 어떤 작품은 그 대상을 빠르게 떠오르게 하고, 그렇지 않은 작품은 다른 의미로 그 대상을 찾아가게 한다. 이상하게도 후자가 편하다. 나는 토끼를 포함한 여러 관계를 칸딘스키와 함께 생각했다.
그리고 안과 바깥 사이의 소수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 중간에 있는 여러가지의 나는 소외되었을 것이다. 바깥 양반의 비중이 크지만, 안사람으로써 전환될 수 없을때, 그 사이에서 엎드린 나를 돌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 바깥으로 돌고 있다. 출근하기 위해, 소리를 내면서 일어나고, 샤워를 하고 무거운 기구로 운동을 하려 한다. 그리고 긴장을 풀기 위해 이상한 개그를 하려 한다. 나의 바깥은 아직 벽돌처럼 튼튼하고, 견고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안쪽의 경계는 점차 허물어져간다. 그 비중이 정확히 뭔지 모르지만, 두 양반이 균형을 잡기를 바란다. 회사인인 나와 퇴근 후 나, 그리고 그 사이 소수점이 잘 통합되기를 바란다. 쿠팡 이츠에서 담아두었던 무화과 그릭 요거트를 지우고, 처갓집 양념 통닭을 담는다. 그저 담아두기만 할 것이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