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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독언 Jun 10. 2023

연극 사의 찬미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김우진과 윤심덕의 정사에 대한 고찰

2023.07.07 ~ 07.16 | 아트원씨어터 3관

사진=연극 사의 찬미 공식 SNS

시놉시스

1926년 8월 4일, 윤심덕과 김우진은 부산행 관부연락선 안에서 실종되었다. 경성 경찰서의 요시다 경부는 그들의 정확한 사인을 찾기 위해 홍난파를 심문하기 시작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던 윤심덕과 김우진, 그들과 유학시절을 함께한 홍난파, 조명희.

이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2023.06.12(월) 16:00 티켓 오픈!

관람 연령, 캐스팅 등 더욱 자세한 사항은 YES24의 공식 예매처에서 확인 가능하다.


브런치 스토리에 소개하고 싶은 공연이 있어서 비교적 빠르게 글을 포스팅한다. 6월 12일 4시에 티켓을 오픈하는 공연이라 급하게 적은 포스팅이기 때문에 본문의 텍스트가 많이 부실할 수 있으니 주의를 바란다.


 최근 연극 <폭풍의 언덕>을 관람하고 난 뒤 좋은 작품들을 추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무관심하게 떠나보냈던 연극들이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평소 관심 있게 살펴보던 사의 찬미가 연극으로 올라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로젝트 디본의 알앤제이 관람을 지인에게서 권유받았으나 당시 일정으로 인해 관람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사의 찬미라니! 소식을 듣고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연극 사의 찬미의 시놉시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 홍난파나 조명희처럼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또한 미상이라는 캐릭터가 이 연극에서 어떤 장치로 관객들 앞에 드러나게 될지 호기심이 생긴다.


연극의 음악적 심상

작품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소중한 취미이다. 연극과 뮤지컬을 관람하는 것은 너무 즐거운 일이지만 사실 취미를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접근성이 비교적 낮은 것은 영화이기 때문에 연극이나 뮤지컬 보다 영화를 더 자주 관람한다. 새로운 영화들을 접하는 것도 즐겁지만 전에 감상했던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 그러던 중 최근 다시 관람할 영화를 찾다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다시 관람하게 되었다. 이별을 선택하는 두 여성 주인공을 보면서 생뚱맞게도 사의 찬미가 생각났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사이 찬미의 오묘하게 비슷하고도 완전히 다른 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한계였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것은 영화의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결국 이별을 선택하고 헤어졌으나 윤심덕과 김우진은 죽음까지도 함께하길 선택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시대적인 배경을 비롯하여 아주 많은 것들이 다르고 네 사람이 마주한 한계의 깊이 또한 다르다. 그러나 아주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결국 두 작품에서 등장하는 이들 모두가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했다는 것에서 맥락을 동일시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나의 접점을 찾으면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접점을 찾는 것은 쉽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 속에서 의도적으로 삽입한 음악적인 요소를 최소한으로 줄인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점을 한번 의식하니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영화 내부에서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을 제외한다면 인위적으로 삽입된 음악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영화에는 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15세 이상 관람 권장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벗은 몸이 모니터에 꾸며진 요소 없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저 여성의 모습 그대로 바라본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처럼 사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경우 남성은 배제되고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에, 가장 극적인 장면에서도 사용된 음악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가장 극적인 장면에서는 음악적인 요소가 사용되었으나 실제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생기는 극적인 상황들에는 그 어떤 음악도 깔리지 않는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음악이 아닌 이들의 행동반경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소리들과 대화가 주를 이뤘는데 이를 통해 나는 이들의 인생을 더욱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삽입되는 음악에 따라 분위기는 극적으로 변화하기도 하고 미묘하게 상황도 변화할 때가 있다. 어떤 캐릭터들의 감정에 공감하고 응원하게 되는 것도 다 진심으로 그 캐릭터들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감독의 의도된 연출에 따라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로맨스 영화를 감상하면서도 이러한 연출 속에서 만들어진 로맨틱한 감정은 어쩌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었는데, 집중력을 요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만들어진 음악적인 요소 대신 캐릭터들의 대사와 그 사이에 놓인 공백. 그리고 적막을 사용한 것은 단순히 대사들을 가지고도 폭발적인 에너지―관객들이 직접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대사들에는 더욱 진정성이 실린다는 생각도 들었다.―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잔잔한 분위기를 통해서도 관객들은 폭발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듣지 못하고 관객들만 들을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삽입된 음악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보면서 적막에서 비롯된 그 어떤 허전함도 느낄 수 없었다. 뮤지컬은 넘버를 통해 캐릭터들의 극적인 심리를 보여주지만 연극에서는 캐릭터들의 연기와 대사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점에서 나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연극 사이에서 접점을 찾았던 것 같다.


작품과 시대적 배경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情死)는 아직도 연극과 드라마, 또한 뮤지컬 등 여러 가지 작품에서 다뤄진다.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의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에서도 1991년 개봉된 영화 사의 찬미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업로드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아직도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는 큰 관심을 받는다. 사의 찬미의 경우 시대적인 배경과 작품을 연출한 연출진들의 의도에 따라 이들의 이야기의 흐름이 달라지고는 하는데, 그럼에도 이들의 정사가 단순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좌절로 인한 것보다 여러 가지 한계점 속에서 가장 본인다운 선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동일한 듯하다. 사의 찬미에서 둘의 정사는 1920년대 당시 녹아 있는 낭만주의적 양상이 담겨 있는데, 1993년 윤대성을 통해 쓰인 희곡에서는 개인의 존재와 인간 존재의 문제, 예술가의 삶과 존재의 의미 등과 같이 더욱 입체적인 한계와 고민이 묻어난다.


사의 찬미에서 보이는 두 인물의 정사 당시 시대적인 양상은 죽음을 칭송한다는 의미를 가진 작품의 타이틀에서부터 나타난다. 많은 이들이 누리는 당연한 것들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깨닫는 순간 흔히 우리는 강한 박탈감을 느끼고는 한다. 가장 단순하게 바라본다면 사의 찬미에서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이 그렇다. 결국 김우진과 윤심덕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선택한 정사는 단순히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닌 여러 가지 기로에 놓여 있었던 서로의 한계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발돋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들의 정사는 좌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읽기보다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현실의 한계를 타파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였지만 가난한 가정으로 인해 본인이 정말 이루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에 한계가 있었던 윤심덕과 사랑하는 윤심덕을 두고 본인의 자식과 아내에게로 돌아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야 하는 김우진의 한계와 더 넓게는 식민지라는 국가의 한계를 모두 타파하는 것이다. 윤대성의 희곡에서 이 둘의 정사는 앞서 말했던 입체적인 한계와 고민에 대한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윤심덕과 김우진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이들에게 있어 연인들의 정사는 삶에 있어 해방과 구원을 나타냈다. 그러니 이들의 이런 선택에서는 삶에 대한 애착이 보이는 행위로도 읽힌다. 그러나 현시대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들의 죽음은 한계에 직면한 젊은 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이로운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내곤 한다.


흔히 동반자살이라는 타이틀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거론되고 있는 예민한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의 찬미에서 김우진과 윤심덕의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으로 화자 된다는 것은 이들의 정사가 시대적으로 자신의 삶을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보인다. 최근 줄거리를 키워드로 도출하면 지극히 자극적이고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재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배우들이 기꺼이 출현하기를 선택하고 마니아층의 관객들이 있던 어떤 영화를 감상하며 결국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예술성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극적인 소재들을 찾아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있을 수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관람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물론 사의 찬미의 키워드가 전에 말한 영화처럼 지극히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처럼 사의 찬미 또한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연극 사의 찬미 공식 SNS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무게를 가진다. 동반자살을 선택하기까지의 김우진과 윤심덕을 마냥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명시했듯 연극을 관람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기 전에 이러한 사항들을 알고 가면 좋지 않을까?


뮤지컬 사의 찬미에서 이들의 죽음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인 사내로부터의 해방으로 보여준다. 연극 사의 찬미에서의 미상에 대한 궁금증을 아직 가지고 있는 상태라 사실 미상이 어떤 연출의 요소로 사용될지 궁금하다. 뮤지컬 사의 찬미는 시대가 바뀌면서 김우진과 윤심덕에 대한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사내의 역할을 통해 이들이 선택한 비극적인 죽음을 현시대적으로 잘 풀어낸 장치로 사용했다. 이 시대의 연인들의 정사는 흔히 구원과 해방을 말하지만 김우진과 윤심덕은 계속 죽음에 대항하면서도 결국 도쿠주마루에서 바다로 뛰어든다. 그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기로에 선 것이 아닌 해방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찬 결정이었으므로 우리는 지금도 뮤지컬 사의 찬미를 떠올리면서 김우진과 윤심덕의 죽음을 그저 비극적인 연인들의 정사로 떠올리지 않는 것이다. 뮤지컬 사의 찬미의 경우 넘버들이 워낙 좋기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윤심덕이 편곡해 발매한 음반의 넘버인 '사의 찬미'가 가장 극적인 장면에서 사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 <사의 찬미>에서는 음악적인 요소를 덜고도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남겨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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