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리퍼 상품일 뿐이고 달라질 일은 없겠구나
자취를 시작한 지는 이제 고작 하루. 나는 원래 어두운 것을 무서워해서 머리맡의 스탠딩 조명을 켜고 자는 것이 습관이었고, 악몽이나 가위에 눌리면 엄마의 품에 파고들며 20대 중반이 되어도 막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는 했다.
불을 다 켜고, 유튜브로는 수면 명상 음악을 틀고 애착 인형의 숨구멍을 틀어막듯 끌어안고 잠들 수 있기를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새벽 2시까지 잠들 수가 없었다. 피곤한 정신으로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서글픔에 휩싸였다.
쫓겨나듯이 나온 자취방
본가에서 5분 거리에 얻은 자취방
내가 살게 될 줄은 몰랐던 그곳에. 그 건물에, 그 장소에 내가 있다. 희곡은 늘 새롭고 어렵다. 어떤 글을 적어야 하지. 내가 적은 희곡이 정말 공연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정말 공연을 올릴 수 있을까.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안정적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좋아하는 것들에 몰두하며 살 수 있을까. 안정적인 모든 것들에는 실증을 내면서, 새로운 것들에는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친다.
지팔지꼰. 불안정한 환경 속에 기꺼이 나를 밀어 넣는 것은 늘 나와 그리고 원망하고 싶은 상황들이었으니. 가족들은 늘 나의 모든 선택을 지팔지꼰이라고 표현했다. 때로는 다 나의 잘못인 것 같기도. 때로는 이런 생각과 고민이 다 의미 없는 것 같기도(어차피 해결할 수 없는 일들뿐이니) 권태롭고 위태로운 것들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눈과 귀를 막는 것이 나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온전한 나의 것이 있을까. 먼지 한 톨, 혹은 집에 남겨진 낡은 인형들까지도. 잠들기를 선택한 나의 눈앞에 있는 이 천장마저도 나의 것이 아니라는 기분이 든다.
내 인생은 때로 리퍼 상품 같고, 때로는 월 결제를 해야 이용할 수 있는 티비 프로그램 같기도 하다. 길을 잃은 것 같기도 했고, 애초에 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 한순간에 전력이 나가버린 집처럼 나는 늘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상황들로 무기력해지고는 했다. 그러니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아픈 어깨가 살려달라며 아우성을 친다. 종종 내 온몸마저도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끼는데, 고장 난 어깨에 주사를 맞기 시작한 뒤로는 왜 이 고통은 온전히 나의 것이어야 하는지의 반추를 잠시 했던 것도 같다.
그러니 전에 적었던 희곡이 떠올랐던 것은 단순히 새벽 감성 때문이 아니라... 다시 적어 내려가고 싶다는 엄두조차 나지 않던 그 희곡이 떠올랐던 것은 늘 경순의 입장이었던 내가 경미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생이 리퍼 상품 같다던 그 말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에. 바보 같던 너의 모습을 떠올리며.
경미: 언니와의 추억은 참 얄궂고 웃겨.
언니는 내 집에서 칼이란 칼은 죄다 숨겨버렸다.
동네 편의점에서 샀던 택배용 아주 작은 칼까지도.
경미, 잠시 침묵.
경미: 그런데도 이 집에는 아직 나를 상처를 줄 수 있는 물건들이 아주 많아.
택배는 어떻게 열어?
경순, 답하지 않는다.
경미를 바라보고 있지만 경순은 아무런 답도 없다.
경미, 경순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경미: 그런 경험 해본 적 있어?
내가 샀던 가구들이 리퍼 상품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다가
내가 낸 적도 없는 스크래치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것에서 누군가 타인의 생활감을 느꼈을 때
그 이후로부터 나는 늘 그런 기분을 느꼈어
난 구제 옷과 리퍼 상품일 뿐이고 달라질 일은 없겠구나
경순, 길게 한숨을 쉰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경순: 나는 너를 상처 주는 너를 용서할 수가 없어.
경미: 알아
경순: 생각하고 행동해.
제발 생각하고 행동을 해봐
내가 그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아?
네가 옥상 끄트머리에 앉아서 휘청거리고 있었을 때...
경미: 알아. 미안해.
그런데 그게 끝이었잖아. 그때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어.
생각이 너무 많고, 때로는 그걸 주체하지도 못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