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끝난 후

이 관계에는 명확한 피해자와 가해자가 없다

by 한독언

늘 그를 파란색으로 기억하고는 했다. 때로는 채도가 아주 높고 명도가 낮은 파란색으로. 때로는 주로 하늘색이라 표현하던 그 색으로. 누군가를 떠올릴 때 그 사람을 고유한 색으로 떠올리는 일에는 어느 정도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업적인 영향이 있었다. 숫자를 바라보며 1은 빨간색, 2는 노란색, 3은 주황색, 4는 빨간색... 이런 식으로 상황을 가늠하는 것처럼. 나는 늘 노란색이었다. 노란색을 좋아했고, 생애 처음 사귄 친구이던 지민이 들고 다니던 노란 강아지 인형의 이름이 노랑이었으니까.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에서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는 문장을 참 사랑한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나는 무엇보다 지민이를 사랑했다.


노란색은 아직도 내가 가장 활용하지 못하는 색 중 하나. 조금만 채도가 낮아져도 쉽게 탁해지고, 때로는 탁한 녹색처럼, 때로는 노란색이 아닌 주황색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가장 좋아하는 색과 그 색을 사용하고 디자인에 녹이는 일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나는 노란색이 좋았다. 이 모든 과정이 꼭 내가 바라보는 나를 닮은 것 같아서.


파란색. 그러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따로 있었다. 그를 바라봤을 때 내 머릿속에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던 하나의 색. 그러니 나는 단 한 번도 그 애에게 그 색을 좋아하는 이유에 관해 물어본 적이 없다. 이유는 약간의 오만. 내가 좋아하는 그의 모습만 마음에 담아가겠다는 미련함―환상에 대한―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달의 뒷면을 영원히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바라보는 그의 모습만이 그의 완전함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딱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더 이상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점차 괜찮아지는 마음. 괜찮아질 것이라고 나를 다독이며 나를 위로하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를 생각하고 그와의 추억을 곱씹는 횟수가 줄어드는 그런 보편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한순간에, 내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무언가가 벗겨지듯이. 정작 내가 그를 통해 봐야 했던 것들이, 모호하게 내 애정으로 인해 감춰져 있던 것들이 단 한숨에 벗겨졌다.


콩깍지가 벗겨진 것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어떠한 불공평한 상황에 대한 현실을 파악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더 이상 아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연극 <노베첸토>의 이 대사는 내 가슴에 깊게, 그리고 오래도록 남았다. 일전에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극단적이지는 않게. 전에 서술한 것처럼 점차 괜찮아지는 순간을 경험했을 때...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니 내가 더 이상 그를 습관처럼 떠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처럼. 내가 더 이상 잠들기 전과 일어난 직후에 그를 떠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던 것처럼.


이 극단적인 관계의 종료에는 계기가 있었다. 그는 내가 그에게 안절부절못했던 사실을 즐겼던 것 같다. 흡연구역 구석에 쪼그려 앉아 그와 연락하고 있었던 때였다. 문득 그의 연락 하나에서 하나의 모욕감이 몰려왔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의 태도에서 당혹감이 몰려왔고, 나는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고?’라고 되묻는 것조차 잊은 채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다. 그 후에는 웃음이 나왔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보다는 웃음이 먼저였다. 나를 우습게 만들었다는 배신감과 모멸감. 그런 것들을 느끼자, 앞으로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그를 받아주는 내가 당연할 그에게 이 태도의 변화를 어떻게 들키지 않아야 할지. 그에게 오는 연락들에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지 혼란이 일기 시작했다.


잔정이 많은 나는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가 나에게 하는 많은 행동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는 했다. (상담에서는 이를 수용하는 태도라고 했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와 무례,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바라보며 그 연유를 묻던―나는 늘 대답하고 싶지 않아 했지만 기어코 그와 관련된 고민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에야 그는 질문을 멈추고는 했다. 나는 늘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그를 쉽게 용서하던 나였으니까. 그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를 상처를 줄 수 있는 권리를 내어주며 그를 늘 기꺼이 용서했다. 그 후에는 그의 내면에 있을 깊은 고민과 고충, 나름의 고뇌를 떠올리며 나를 상처 주는 그를 용서했고, 관계의 불균형을 이해했으며 그가 나를 보고 싶어 할 때는 기꺼이 그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그의 내면이 깊을 것이라는 생각한 것도 내 환상에 불과했다. 그가 그토록 깊은 내면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 대한 것으로 생각한 것도 오만이었다. 때로 나는 사무치게 그를 보고 싶어 했고, 나는 늘 그가 나를 불편해할 것을 배려하며 그 또한 내가 보고 싶어지는 순간을 기다리고는 했다. 이 모든 것들로 내가 우스워지며 그간 내가 그에게 허용했던 이 관계의 불균형이 나를 얼마나 수치스럽게 만들었는지 순간 실로 통감한 것이다. 모른 척 했던 것들이 나의 잘못이라면 이 관계에 있어서 명확한 피해자와 가해자가 없다.


단순한 배신감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내가 본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즐기던 그가 내놓은 말 한마디가 나의 모든 사랑과 애정을 0에 수렴하게 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우스웠다. 단 한 순간에 모든 것들이 바뀌는 느낌. 세상이 바뀌는 느낌. 세상이 모든 것이, 심지어 내게 그리도 못되게 굴던 그마저도 변함이 없는데. 영화의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지루한 장면에 비유하자면 나는 그 장면을 배속한 것도, 건너뛴 것도 아닌 그저 영화를 종료해 버리듯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바로 5분 전까지만 해도 나를 웃고 울게 했던 그에 대한 나의 시선을 비웃게 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어떠한 의무감과 사명감에 불타있었다.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허락해 놓고. 차창 너머의 뿌연 창문을 닦으며 그 너머에 있는 그를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온전히 그 창문을 내려 그를 바라보았을 때. 바람이 내 머리카락과 얼굴을 스치고 폐부로 들어차는 시원한 새벽 향기가. 나를 늘 골몰하게 했던 그가...


그러니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겠다던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주변의 모두가 이 관계가 나와 그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존중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는 안쓰럽게도 모든 것을 받아주는 나를 보며 안정감을 느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미련한 나와 그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사랑이 끝났다. 나를 지치게 만들던, 나를 60세의 노인처럼 만들던 그 사랑이. 사랑하지 않겠다 해놓고 나 스스로를 질질 끌어가며 나를 그늘 진 곳에 밀어 넣던 내 기대와 관성을 끊어버렸다. 그 사랑이, 예상치 못한 단 한 순간 단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