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항상 독서를 통한 읽기와 일기를 통한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도 바쁜 현실 속에서 그 충고를 실행에 옮기기는 너무 버거웠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수준 낮은 일기나 끄적거림으로 만족하다 방학이 오면 책을 읽을 엄두를 가끔 내어보는 정도로 끝내야 했다. 대학 입시에서 서울대 낮은 커트라인의 과에는 합격할 수 있고 그 당시 국내 4위권 대학인 부산대학에 과수석으로 입학하는 공부 실력을 가졌었음에도 나의 지적 수준은 일천하기 그지없었다. 영원히 콤플렉스로 남을 것만 같은 지적 암흑기였다.
그러다 첫사랑의 상처를 극복하려 재학 중에 갈 필요가 없는 군대를 가게 되면서 본격적인 독서가 시작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좌파가 열광하는 함석헌 선생이나 이영희 교수 같은 분들의 책까지 접하면서 뻔한 교과서적 독서를 넘어서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 책들은 서구적 독재 교육의 그늘에서 자란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고 지금도 한복을 주로 입는 내 정신적 자부심의 근간이 되었다. 그래도 나의 지적 수준에는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일기 같은 일상의 기록이나 수동적 독서를 통한 약간의 지적 향상은 가능하였으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적 발달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불가능은 제대 후 교육학에서의 엄청난 과제를 소화하면서 서서히 깨어지기 시작했다. 문과 교육을 받은 분들이 이과 교육만 받은 분들보다 똑똑해 보이는 이유가 이런 훈련에 있었다. 문학이나 철학 같은 것을 전공한 분들의 언어는 청산유수인데 그 뒤에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절차탁마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거의 모든 문과 출신들처럼 한 단계를 뛰어넘는 정신적 발전의 단계로 접어들지는 못했는데 그 콤플렉스는 묘하게도 투병으로 온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세속의 이익을 포기하면서 극복이 시작되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목숨을 건 철학 및 종교 서적 읽기와 국선도를 통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착각한 후 그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작업에 나서면서 발전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느낄 정도로 또다시 무너지는 건강 앞에서 패닉에 빠져 미친놈과 같은 세월을 보내고 국선도처럼 임시방편이 아닌 정말 바른 건강의 길을 찾아 다시 회복되면서 인간으로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엄청난 독서의 세월 속에서 소설로서는 유일하게 나를 당혹하게 한 세상이 인정하는 명작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카프카의 '성'이다. 철학이나 종교는 본디 세상에 대한 지배에 그 목적이 있으니 누구라도 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복잡성과 누구라도 자신들을 넘어설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근거 없는 난해함이 기본이라 하겠으나 도대체 소설이 왜 이런 난해함을 보이는지 나는 도무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현대 대중문화처럼 돈을 벌기 위한 무분별한 자극이라 판단하기에는 찜찜한 그 무엇이 남는 그런 책이었다. 그러려면 재미라도 있어야 하는데 소설이라기에는 너무 지겹고 문학 전문가들의 명저라는 말에 공감하려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라도 남아야 하는데 도대체 이 책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혼돈 덩어리 그 자체였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을 더 보내고 다시금 카프카의 성을 읽고 싶다는 마음을 낸 것은 딸아이의 대학 과제인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를 함께 읽으면서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딸과 나는 무수히 많은 토론과 대화를 거쳐 하나의 보고서를 완성하는데 영원히 읽지 않을 것 같은 고전을 다시 한번 읽고 나자 과거의 콤플렉스를 극복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수십 년 전에는 너무나 지겨워 의무감으로 겨우 겨우 끝까지 읽었던 이 책을 지금은 너무나 재미있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600페이지나 되는 엄청난 분량을 불과 이삼일만에 다 읽어버렸다. 그것도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했다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 책은 부조리하다. 정신병적 혼돈 상태에 빠진 것 같은 문장의 전개가 가장 대표적인데 현대 인터넷 논객들의 정신세계와 비슷한 면이 있다. 자신들을 위해 일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주인공인 k를 이 마을로 끌어들이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성의 고위 관료인 클람과 사무관들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그들을 보필하는 면장은 물론 여관의 주인, 머슴, 하녀, k의 조수, 일반적인 마을 사람들은 물론 학교의 선생들까지도 부조리의 극단적 모습을 보여준다. 더욱 슬픈 일은 현재 상황에서 그 성이란 시스템의 가장 큰 피해자인 k와 그 사랑하는 여인인 프리다까지도 부조리하다는 점이다.
다들 자기의 잘못에는 입을 꾹 닫고 무조건적 비난을 외부로 돌린다는 점에서 현대의 정치인이나 그 맹목적 지지자들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과거의 가장 큰 피해자로 그 불행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바르나바스 집안의 젊은 자녀 셋이 바른 세상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자신의 딸 아말리아를 성욕의 노리개로 삼기 위한 성 고위 관료의 압제로인해 모든 걸 잃고도 성의 관료들을 통해 집안의 부활을 꿈꾸다 건강마저 잃고 자식들의 짐이 되는 어리석은 부모 세대의 영향을 받아 여전히 성의 은총을 기대하는 어리석은 사고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지만 자신들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는 유일한 등장인물들로 보면 틀림이 없다. 성자가 아닌 인간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은 바로 바르나바스 집안의 삼 남매들이다.
횡설수설하여 정신병적으로 보이는 이 소설은 상당히 치밀한 내적 구조를 가지고 그 혼란이 모두 작가의 의도된 작업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성은 넓게 보면 인생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고 범위를 좁히면 사회구조나 종교, 사상 심지어는 가정이 될 수도 있다. 외부에서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명백한 오류가 내부에서 계속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진리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아니, 명백한 오류일수록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더 나아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더 큰 힘으로 지켜나가야 한다. k처럼 시스템의 부조리에 항의하면서도 자신이 약속받은 그 부조리의 열매 앞에서는 오늘날의 민주인사들처럼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성의 고위 관료인 클람이나 사무관들처럼 겉으로는 국민들에 대한 자애로운 마음에 큰소리 한 번 안치면서도 교묘하게 법이란 것을 이용해 민생을 파괴하는 자들은 오늘날의 보수 인사를 닮아있다. 종교의 예를 들면 민주 인사와 보수 인사는 각각 신흥 종교의 교주와 기존 종교의 교주에 비길 수 있다. 성은 그렇게 나날이 공고해진다.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가 전쟁 같은 환란기의 영웅적 인물들을 통해 극복 가능한 부조리를 비추고 있다면 카프카의 성은 평화 시기의 극복 불가능한 시스템적 부조리를 비추고 있다.
그 더러운 세상 속에서 아말리아 같은 여성만이 성녀처럼 개인적 고고함을 지켜나가나 온통 성에 관심이 쏠린 세상을 바꿀 가능성은 전혀 없다!
카프카는 이 정도 메시지의 전달에서 멈추는데 이는 종교 집단의 허무주의와 맞닿아있다. 먼 훗날 바르나바스 가족과 k가 성공하여 클람이 되는 날이 찾아온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성은 전혀 변함없이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서 있을 뿐이다. 마음의 성전처럼 성에서 탈출하거나 성을 진보시키는 방법은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카프카는 41세의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만다.
부조리한 성의 횡포에 심각한 건강상의 타격을 받고 스물아홉에 벌써 죽거나 폐인이 되었어야 할 나는 육십이 다 되도록 살아남아 과거의 나처럼 이유도 모르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정신병자란 조롱도 마다하지 않는데 그는 허무주의적 말씀의 힘을 빌어 교주님들처럼 영생을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