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수
대학교 2학년 봄날의 일이다. (아마도 내 기억이 맞다면 그즈음일 것이다.) 당시 의대생이었던 친한 언니로부터 갑작스럽게 여수 여행을 제안받았다. 아마도 1박 2일이었던가.
당시의 우리를 회상하자면 그래도 아직은 낭만이 살아있던 대학시절을 보낸 것 같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서울로 대학을 가고 나와 언니는 각자 의대와 교대에 진학하며 고향에 남아 있던 터라 서로의 대학시절을 공유할 기회가 많았다. 각자의 학교생활과 동아리와 연애사 등등에 대해...
나름의 공부 스트레스에 찌들어가면서도 틈틈이 그간의 입시지옥에서 탈출해 한을 풀 듯 대학생들만이 누릴 수 있던 자유와 방종을 만끽한 한창 팔팔한 싱그러운 청춘이었다.
여하튼 붕붕 떠다니는 마음만큼이나 여기저기 쏘다니고 싶어 안달이 났던 나에게 언니의 갑작스러운 여행 제안은 너무도 신나는 일이었고,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우린 다음날 여수로 출발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여행길이었지만 무엇이 그리 재밌고 설레고 흥분되었는지 여수 여행의 기억은 고스란히 내 기억의 저편에 간직되었고, 그렇게 흘러 20년이 훌쩍 지나갔다.
2022 여름. 전 지구적 대재앙인 코로나로 끊겨버린 여행길을 올해는 제대로 되찾아보고 싶었다. 여름휴가를 앞두고 어디로 떠날지 고민하다가 이제 더 늦어지면 남도 여행은 못 할 것만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장거리 운전은 이제 허리가 버티질 못한다.) 그래서 큰맘 먹고 이번 여름휴가는 여유롭게 짝꿍이랑 3박 4일 코스로 떠나보기로 계획했다. 대략적인 루트만 정하고 그날의 컨디션과 날씨 상태에 따라 변동 가능성을 충분히 둔 아주 탄력적인 계획을 세웠다. 물론 이번 여행 계획들은 INTJ인 내가 우리 커플의 성향과 니즈를 반영해 폭풍 서치를 해가며 세웠고, 여행 계획을 세우며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반대로 낭만주의자인 짝꿍은 오히려 즉흥적인 편이라 일일이 계획을 미리 물어보고 찾아보는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그날그날 내가 계획한 곳을 찾아가며 맞닥뜨리게 되는 풍경과 경험들을 즐기고 놀라워하며 이런 곳에 데려와준 나에게 고마워했다. 서로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 둘이 각자의 방식으로 충분히 즐긴 여행을 하고 온 것 같아 다녀와서도 기분이 좋다.
7시 반 인천 송도 출발
중간에 두 번의 휴게소를 들리고
둘이 교대하며 운전을 했다. 초반 인천에서 천안쯤까지 조금 밀리긴 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휴가철이 아니라 그런지 평일 오전은 갈만 했다.
7월 20일 기준: 인천 송도 - 여수 오동도(4시간 30분쯤 소요)
생각보다 우린 먹는 것에 목숨 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절히 해당 지역에 가면 맛집 정도는 한두 군데 꼭 들린다. 오늘은 휴게소에서 먹은 점심까지 합해 두 끼를 먹었다. (우리의 연약한 위에는 딱 적당한 정도?!)
원래 예정했던 첫 번째 목적지는 녹테마레였지만
평소에도 몇 번이고 미술관이나 아트월드를 많이 갔던 터라 더운 날씨를 견딜 수만 있다면 자연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먼저 가자고 하여 계획을 오동도로 수정했다.
결과는?
말해 뭐해
조금 덥기는 했지만 역시는 역시다. 내 안구는 이런 풍경을 원했어!!
오동도가 이렇게도 시원했던가. 이런 숲이 우거져 있었던가.
20년 전 오르내렸던 나무데크가 이쪽 길이 맞았던가.
기억을 더듬고 더듬다 보니 벌써 한 바퀴를 다 돌아버렸다.
귀에는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 빽빽이 우거진 나무 숲의 잔잔한 향내와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까지 삼박자가 제대로다.
돗자리를 깔고 누워 신선놀음을 하면 이곳이 지상낙원일 듯하다.
참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데... 이렇게 시원한 바람에서도, 물 한 모금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인데...
왜 이리 요즘의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소소한 일상의 행복에서 멀어지는 선택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승진이 뭔지...)
서둘러 캔 음료로 목을 축이고
한여름 가장 더운 시각인 2-3시라 우리는 동백열차를 타고 주차장까지 오기로 했다.
사실 날씨만 좋으면 걷기에 충분한 거리다. (약 15-20분 정도)
땀이 너무 나서 일단 예약해둔 호텔 먼저 체크인하기로 했다.
급히 정한 여행이라 좋은 숙소는 이미 마감이 되었고 비교적 깨끗하고 가성비 좋으면서도 바다가 보이는 숙소로 예약했는데 생각보다 아담한 규모라 조금 놀랐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살면서 1층으로 숙소를 예약해본 적이 없는데
베란다 밖으로 지정 데크가 있어서 앞마당을 내 집처럼 쓸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좋았다. 전반적으로 호텔 같은 고급진 느낌은 없지만 심플하게 있을 건 있고 쾌적했다.
어느 정도 재정비 후 제대로 된 여수 음식을 먹으러 갔다. 동선 상 멀리 가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돌산 내에 있는 맛집을 찾았고 짝꿍이 해산물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아 그동안 식당에 가면 반찬으로 나오는 게장은 입에도 안대는 타입이었는데 남도 여행 기념으로 대차게 게장을 먹어보겠다고 선언!
인생 첫 게장은 제대로 된 것을 먹게 해 주겠노라 다짐하며 들른 곳은 바로 황금 게장집.
여수 게장 클라스보소.
이건 흡입하기 전에 사진으로 꼭 남겨야 할 것 같아 먹기 전에 간곡한 양해를 구하고 카메라 샤워를 시켜줬다.
야무지게 비닐장갑 꼭 끼고 양손 스킬을 발휘하며 게장을 클리어 한 짝꿍은 비로소 왜 간장게장이 밥도둑이라 불리는지 몸소 깨우친 동시에 돌산의 명물 갓김치에도 눈을 떠버렸다.
인생의 참 교육은 역시 현장인 것인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발로 뛰며 몸으로 체험하는 배움은 진정한 것이로다.
결국 간장게장과 갓김치는 택배 주문까지 시키고 말았다! (황금게장에서는 택배 주문이 가능하다)
두둑해진 배를 소화시키러 가까운 만성리 검은 모래 해변에 가기로 했다.
이곳의 특이점은 단연 검은 모래이다.
그러나 검은 모래라고 해서 뭔가가 엄청나게 다를 줄 알고 큰 기대를 하면 절대로 안된다.
하지만 오히려 이곳이 패러글라이딩 착지 장소라서 한쪽에는 수영을 하는 인파와 한쪽에는 거대한 패러글라이더가 내려앉는 모습이 동시에 펼쳐지니 왠지 모르게 이국적이긴 했다.
은은한 파스텔 색감의 그라데이션이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를 하염없이 들여다보다가
6시가 되니 해수욕하는 사람들을 나오라고 하는 신호가 울렸다.
왠지 모르게 나도 그 자리를 떠야 할 것만 같아서 해변을 뒤로한 채
근처 사람 냄새나는 재래시장을 가보기로 했다.
우리가 들린 곳은
여수 서시장
유난히 족발집과 떡집이 많이 보였다.
딱히 떡과 족발을 먹을 것은 아니었기에 구경만 하고 간단히 맥주와 과자 안주거리를 사서 숙소로 컴백.
예상보다 많은 곳을 들리고 많은 걸 했던 남도 여행 첫날의 여수 코스였다.
내일은 비가 온다는데 어떤 여행이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