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남해
이튿날 아침. 6시 반에 알람도 없이 깼다. 휴가를 와서도 나라는 사람은 늦잠을 자지 못하는구나…
그렇지만 몸에 배어있는 출근 기상 모드를 굳이 바꾸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아침형 인간인 나 자신이 좋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에 가까운 새벽녘을 좋아한다.
오늘보다 좀 더 부지런을 떤다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시각을 마주할 수 있다.
동이 트기 한 시간 전부터 30분 전까지의 그 어스름. 나는 그 어스름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그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는 약간의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강한 의지가 좀 더 필요한데 그 점 또한 이 시간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쉽지 않은 시간대. 노력을 기울여야만 얻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비유하자면 내게 그 시간은 마치 누군가를 한 번도 허락하지 않은 빳빳한 새 셔츠의 옷깃 같고, 조용한 절간에 퍼지는 은은한 향내 같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침범 받지 않은 듯한 깨끗한 그 시간을 좋아한다.
한동안 멍한 상태에서 이른 아침을 만끽하다가 이내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음 일정을 위해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생각보다 둘 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 아침 식사로 가볍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기로 결정!
근처의 스타벅스로 길을 잡았다.
알고 간 건 아니었지만
제일 가까운 스타벅스가 마침 어제 서시장을 다녀오며 보았던 이순신 장군 동상 옆 즈음 바다와 맞닿아 있는 아주 이국적이고 푸르른 여수 해양 공원 에 있었다. 어제 저녁 서시장을 들리면서 해양 공원까지 걸어가 보고 싶었지만 맹렬한 태양이 그때까지 우뚝 떠 있어 산책 의지를 접고 말았었는데...
이렇게 시원한 아침의 바다라니. 럭키!
나는 끝내 가고 싶은 곳들을 다 찍고 마는구나 ㅋㅋ
요트라도 타고 바다로 나가야 할 것만 같은 풍광이었다. 여러 가지 모양의 배가 들락거리고 왼편엔 케이블카가, 오른편엔 다리 위로 지나가는 여유로운 차들. 그 한가운데를 메우는 굼실대는 파도와 눈을 뜨기에도 힘들 만큼 불어대는 파란 바람, 쨍한 아침 햇살은 우리의 기운을 2000% 끌어올렸다.
파란. 여수, 안녕!
남해의 첫 행선지는 여러 가지 블로그 서치를 하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그리고 우연찮게 미용실에서 원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남해로 휴가를 간다고 하니 꼭 가보라고 추천해준 남해 로컬푸드마켓, '바래온' 이다.
분명히 네비를 잘 찍고 갔는데 도저히 이런 모양의 건물이 나올 것만 같지 않은 논길로 차가 들어섰다.
"잘 온 거 맞나?"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짝꿍에게 일단 한번 가보라고 해놓고도 내심 불안했다.
그런데 갑자기 두둥!
파란 하늘과 어우러지는 빈티지스러운 하얀 담벼락. 그리고 예쁜 돌담이 어우러진 이곳은 한눈에 봐도 핫플. 그 자체 :)
영업시간은 11시에서 6시까지.
우리가 그날의 첫 손님이었던 듯하다.
휴양지란 이런 곳일까?
해외여행으로 여러 곳을 쏘다녔지만 막상 휴양지로는 가본 적이 없다. 편안히 누워서 한적한 뷰를 바라보거나 물놀이하고 맛있는 거 먹고 놀다 오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을 보니 그냥 온갖 시름 다 던져버리고 멍 때리고 오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일었다.
구석구석 주인 분들의 세심한 손길이 느껴지는 공간 속 로컬푸드 마켓답게 다양한 수제 어묵과 멸치, 새우, 미역, 다시마, 멸치액젓, 유자청들을 팔고 있었고, 그밖에 예쁜 마그넷이나 가방 같은 소소한 소품들도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멸치액젓과 유자청을 겟.
보냉백을 안 가져온 게 천추의 한이 되었다. 삼일 내내 우리와 함께한 멸치액젓과 유자청. 들고 다니느라 힘들었다. 차에 보냉백 하나쯤은 넣어 다녀야겠다.
아침에 샌드위치, 커피, 그리고 바래온에서 어묵까지 배를 채우고 와서 그런지 12시가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아 우린 바로 남해 독일마을로 가보기로 했다. 때마침 구름 낀 흐린 날씨라 야외 활동을 하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남해 독일마을은 꼭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너무 멀어서 엄두가 안 났던 곳인데, 이번 여행에 꼭 가려고 마음먹은 주요 스팟 중 하나였다.
독일마을은
1960년대 산업역군으로 독일에 파견되어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독일 거주 교포들이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삶의 터전을 제공해주고, 독일의 이국문화를 경험하는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2001년부터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출처: 네이버)
이곳은 파독 전시관 앞 넓게 펼쳐진 독일 광장.
파독전시관을 나와 슬슬 내려가다 보면
이게 주거지역인지 음식점인지 펜션인지 모를 즐비한 주황 지붕 거리가 펼쳐진다.
프라하나 독일에서 보았던 주황 지붕, 빨간 지붕의 전형적인 독일의 집들은 아니었지만 뭔가 우리의 자연과 이국적인 주황 지붕들이 만나 펼쳐지는 색감이 참 예쁘고 또 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보고 또 보아도 계속 카메라를 찍게 되는 마성의 곳.
열심히 걷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독일 하면 뭐다? 학센! 소시지!!
검색을 거듭하다 왠지 통창으로 뷰가 제일 좋을 것 같은 쿤스트라운지로 선택했다.
아. 그래 이곳이야.
창 밖을 볼 수 있는 테이블은 자리가 잘 나지 않았고 살짝 덥긴 했지만 사람들이 빠지는 타이밍이라 운 좋게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뷰를 위해 좀 참지 뭐.
쿤스트 라운지는 규모가 꽤 컸고 1층 라운지 바깥으로도 저렇게 빈백이 놓여 있어 시원한 저녁에는
가볍게 밖에서 커피나 와인을 즐기기에도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오늘은 패스.
우리는 학센과 아잉어 독일 맥주를 주문했다.
아잉어는 내 친구 민갱씨가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면 한 두병씩 늘 가져와서 맛을 알고 있던 맥주다.
도수가 세지도 그렇다고 밍밍하지도 않은 깔끔한 맛의 맥주인데 나는 이 맥주의 매력을 병과 병뚜껑에서 찾고 있다. 이 예쁜 패키지를 어쩔 거야.
마지막 사진. 이걸로 됐다.
이건 내 프로필 사진 전용으로 써야지 :)
배를 채웠으니 이제 디저트 타임.
남해에 유자가 유명한 건 처음 알았는데, 미용실 원장님 남해 여행 추천 스팟 두 번째는 '카페 유자'이다.
이미 유명한 곳인지 검색창에 검색어를 다 넣지 않아도 자동으로 상단에 뜬다.
생각보다 아담한 규모의 카페였는데 그 비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우리는 유자 주스와 유자 카스텔라를 주문했는데 아직도 잊기 힘든 달콤 새콤한 맛이 일품이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위치한 작은 카페가 잘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오늘 예약한 숙소는 살짝 기대가 되어서 재정비를 하고 나올 겸 숙소로 향했다. 야외 테라스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독채 펜션이었기 때문이다.
시원한 밤바다를 보며 맥주 한 캔에 짝꿍과 도란도란 이야기할 생각을 하니 이런 힐링의 시간이 한없이 고맙고 소중해진다.
씻고 편안한 차림으로 나와 커피 한 잔 들고 동네를 돌아본다. 얼마만의 한적한 시골마을인지.
한숨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다. 초복이 지났는데 삼계탕 한 번 못 먹은 우리에게 몸보신을 시켜줄 때가 된 것 같아 장어구이를 먹기로 했다.
현지인들만 가는 로컬 맛집 느낌 제대로인 ‘달반늘’ .장어구이 맛집이다.
이미 식당 안을 들어가 보니 만석이었고, 딱 두 명 앉을 테이블이 하나 남아서 운 좋게 바로 음식을 시킬 수 있었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익히 우리가 아는 그런 식의 장어구이가 아니라 돌솥 팬에 숯불 구이식으로 양념이 되어 지글지글 장어가 익혀 나온다.
2인은 작은 사이즈를 시켜도 된다고 해서 주저 없이 주문. 드디어 나온 비주얼은 그야말로 깡패였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던 짝꿍은 그대로 장어를 흡입해버렸고 들어간 지 20분도 안되어 우리는 모든 식탁의 음식을 초토화시켰다. 이렇게 잘 먹을 줄 알았으면 평소에 장어 좀 사줄걸 그랬나?! 히히
배가 두둑해져 나와보니 그제서야 식당 앞에 펼쳐진 바다가 보였고, 구름 사이에 오묘한 오팔 색을 뿜어내며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 반대쪽으로 가보자며 차를 타고 바닷길을 따라 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연히 선택한 이 길이 남해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선물 같이 다가온 풍경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차창을 내리고 사진을 찍은 게 이 정도다. 멈춰서 찍고도 싶었지만 차로 내달리며 맞는 바람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남해 바다를 보며
남도 여행 이틀째를 마무리 지어 본다.
내일 펼쳐지는 통영 여행은 어떨까? 기대하며 오늘은 하염없이 남해 바다를 만끽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