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가 어젯밤에 보았던 남해 바다를 보았다. 매일매일 보아도 질리지 않을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니 오늘이 마지막 여행날이라는 사실이 자못 아쉬웠다. 지금 이 기분과 바람과 풍경을 오래오래 간직해야지.
다시 숙소로 들어가려고 보니 문고리에 센스 있는 주인장 아저씨의 선물 보따리가 귀엽게 걸려있었다. 참으로 별 것 아닌데 이런 소소한 것에서 기쁨과 감동을 받는 것이구나. 머리로는 알면서도 잘 실천이 되지 않는다. 나도 이렇게 작은 것에도 마음을 쓰는 넉넉한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숙소에서 통영까지는 약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되었다. 그동안 통영은 친구와도 와보고, 직원 여행으로도 와 본 곳이었지만 그때마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와보지 못해서 이번엔 꼭 들리기로 했다.
첫 통영 목적지로 찍고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댔는데 우연히도 그곳에는 삼도수군 통제영과 국보 지정된 세병관이 있었다. 요즘 이순신 시리즈 1탄 명량에 이어 영화 '한산'이 개봉하게 되면서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검색창을 열어보니 최근 블로그에 많은 이들의 리뷰가 올라와 있었다.
2시간 운전을 하고 오자마자 땡볕 아래 5분도 서 있기 힘들었던 우리는 막상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통영을 떠나오니 이곳을 가보지 못한 게 약간 후회가 된다. 통영에 올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세병관과 통제영은 가보시길 추천한다.
충무김밥으로 유명한 통영은 그 이름마저도 이순신과 깊은 연관이 있다.
'통영'이란 지명은 삼도수군 통제영에서 비롯된 것이고 , '충무'는 이순신의 호 충무공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순신의 고장 통영이다.
양 옆으로 늘어서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들을 보니 이순신이 지휘하던 조선시대 막강한 우리나라 수군의 위상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이들에게도 역사를 가르치며 이순신 이야기가 나오면 열변을 토해가며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백문이 불여일견. 꼭 통영에 와서 역사의 산 경험을 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들 데리고 역사투어 현장체험학습을 해 보아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잠깐 해 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부분이 많아 이런 마음은 언제나 희망사항에 그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은 역사체험보다는 놀이공원을 훨씬 좋아한다.)
발걸음을 옮겨
동피랑으로 가는 길목에는 통영의 핫플 통영중앙전통시장이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한 우리는 이곳에서
통영의 명물. 충무김밥을 먹고 가기로 했다.
즐비하게 늘어선 충무김밥 거리 중 늘 오면 들어가는 곳은 정해져 있나 보다.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이 가게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정갈하게 늘어선 충무김밥과 섞박지, 오징어무침과 어묵무침의 조화가 담백하면서도 좋다. 놀랍지만 우린 1인분을 시켜 나누어 먹었고, 양이 꽤 많았다. 우리처럼 위장이 유약한 사람들은 이 정도 양이면 충분할 듯하다. (이곳은 택배 주문까지 받고 있었다.)
딱 알맞은 정도로 배를 채운 우리는 기분 좋게 동피랑으로 나섰다.
중앙시장으로부터 도보로 10분 정도 걸으면 바로 입구가 나온다. 처음에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그 좁은 골목으로 차를 끌고 가서 주차하는데 애를 먹었다.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도보로 15분 이내에 모든 것이 모여있으니 공영주차장에 편히 차를 대고 걸어 다니는 것을 추천한다.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동피랑은 예전에 갔던 부산의 감천문화마을과 비슷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 규모는 더 작지만 좀 더 정겹달까?
뙤약볕에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려 동피랑 마을 꼭대기에 올라서서 잠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벤치에 앉아 내려다보면 시원한 바다가 어디에서나 반긴다. 인천도 바다와 가까운데 이런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곳은 아니라 그런지 내가 바다 옆에 산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은데 남도는 고개를 돌리면 사방이 바다라 그 존재감은 인천의 바다보다 큰 듯하다.
내친김에 동피랑 다음으로 간 곳은 이순신공원.
동피랑보다 좀 더 웅장하고 멋진 풍경을 감상해 보고 싶은 마음에 결정한 다음 코스였는데 너무 뜨거워진 한낮이라 좀 엄두가 나질 않았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짝꿍이 미륵산 케이블카를 타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양산을 쓰고서라도 이순신공원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순신 관련 명소는 한 군데쯤은 가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7월 중순 한창 피어난 수국이 예쁜 곳으로 유명한 곳이라 가보기로 했다.
탁 트인 바다와 함께 너무나도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은 매우 매우 넓고 큰 공원이다. 다 돌아보지 못했지만
해 질 녘 석양이 아주 끝내줄 것 같은 곳이다. 바다 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데크도 마련되어 있어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은 바닷가에서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
7월 중순에서 한 주 정도 뒤늦게 가니 만발했던 수국은 슬슬 시들어 저물고 있었지만 몇몇 수국이 활짝 만개해 그래도 아쉬운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예쁜 수국은 참을 수 없지.
이국적인 느낌의 이순신 공원
매우 관리가 잘 되어있다. 나무들도 많아 군데군데 쉴 수 있는 공간이 잘 되어 있다. 가을쯤 와보아도 좋을 것 같다.
자 이제 먹부림의 시간.
충무김밥 아점으로 둘이서 일 인분 먹고 지금까지 돌아다닌 거 실화임?
든든하게 배를 채우기 전에 호텔에 짐을 풀고, 씻은 후 땀으로 젖은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밥을 먹으러 나왔다. 여러 가지 후보군이 있었지만 우리는 통영에서 유명하고 거리도 가까운 해물짬뽕집을 찾았다.
심가네 바다 담은 해물짬뽕
이곳은 백년가게로 유명했는데 피크 타임에 가면 줄 서서 기다리는 맛집이라고 했다. 우리는 또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에 들어갔는데 그래도 몇 테이블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짜장면도 먹고 싶고 짬뽕도 먹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본연의 참맛을 느끼고자 매운맛의 버전을 달리해서 짬뽕 두 그릇을 시켰는데!
보이시나요?? 어마어마한 사이즈
옆 테이블에서 이 짬뽕 한 그릇과 다른 사이드를 시켜서 먹는 것을 보고 2인분 짬뽕인 줄 알고 우린 각자 한 그릇씩 시킨 거였는데, 이 양이 1인분입니다. 여러분.
이만한 양인 줄 알았으면 그냥 짬뽕 하나, 짜장 하나를 시킬 걸 그랬어 ㅠㅠ 하면서 후회했지만
후회는 잠시. 이 만한 양이 다 배로 들어가긴 하더이다. 껄껄껄
맛은 생각보다 걸쭉하지 않고 깔끔 담백했고, 맵찔이인 나는 가장 순한 맛으로 했는데 적당했다. 이것보다 한 단계 맵게 한 짝꿍은 좀 매워 보였다. 난 못 먹었을 듯.
나오면서 호텔에 들어가기 전 통영의 명물 꿀빵을 사서 들어가기로 했다. 통영 중앙시장 근처에는 꿀빵 매장이 굉장히 많았지만 그중 가장 리뷰가 좋았던 거북선 꿀빵 가게에 들렀다.
거기에는 팥, 고구마, 호두, 치즈 맛이 섞여 있는 모듬 꿀빵과 일반 거북선 꿀빵이 있는데 우리는 궁금해서 모듬으로 겟! 맛은 개인적으로 그냥 팥이 제일 맛있었다. 꿀빵은 처음 먹어보았는데 촉촉하고 쫄깃한 텍스쳐가 한 번 먹으면 중독처럼 계속 생각나더라.
숙소 주변을 걸으며 소화를 좀 시키고, 들어가서 티비 좀 보며 뒹굴뒹굴하다가 해가 지고 시장이 끝나기 직전 중앙시장에서 회를 뜨러 다시 나왔다.
시장에서 직접 뜬 활어회와 맥주 한 캔은 우리 통영 여행의 하이라이트였기 때문에 달아 공원의 석양을 포기하고 우린 회를 선택했다. 싱싱한 감성돔 한 마리를 2만 원에 먹을 수 있는 호사는 여기에서만 누릴 수 있는 거겠지?
달큼하면서도 탱글탱글한 식감의 회는 소주와 함께 쉴 새 없이 뱃속으로 들어갔고 달아 공원을 포기한 값은 족히 넘었다. 행복이란 이런 걸까.
다음날 아침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통영 와서 먹지 못한 멍게비빔밥과 꼬막 무침, 해물된장찌개와 굴전을 끝으로 이번 남도 여행의 대장정은 막을 내린다.
아침식사는 숙소 앞 식당이었는데 꽤나 넓고 메뉴가 아주 합리적으로 짜여 있다.
당분간 이 행복했던 여행 기억으로 또 몇 달을 살아나가야겠다.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와중에 일상의 소중함과 여행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낀 행복한 추억이다.
이렇게 긴 여행을 또 언제나 갈 수 있을까 싶지만
여수, 남해, 통영 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