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쓰고 사는 얼굴들

가면을 벗는다고 진짜가 되는 건 아니다

by 야옹이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가면을 벗고 진짜 나로 살고 싶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한 가지 착각이 숨어 있다.
가면을 벗는다고 해서 ‘진짜 나’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하나의 역할, 하나의 ‘버전’일 뿐이다.

가면은 거짓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다른 얼굴을 쓴다.
직장에서의 얼굴, 친구 앞의 얼굴, 가족 안의 얼굴.
이건 위선이 아니다.
그저 서로 다른 세계와 어울리기 위한 언어의 차이에 가깝다.

가면이 없었다면 우리는 사회와 연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페르소나는 타인을 속이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얇은 막이다.
그 막이 없다면, 관계의 공기는 너무 거칠다.

가면을 벗은 나도 또 다른 얼굴이다
그래서 묻는다.
“그렇다면 가면을 벗은 내가 진짜 나일까?”
아마도 아니다.
그 ‘벗은 나’ 역시 과거의 경험, 상처, 기억으로 짜여진 또 하나의 자아일 뿐이다.

가면을 벗은 나를 진짜라고 믿는 것도
또 하나의 착각이다.
그건 가면의 반대편에서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 뿐이다.

진짜 나는 어디에 있을까
융은 인간의 자아를 여러 층으로 나누었다.
의식, 무의식, 페르소나, 그리고 ‘자기(Self)’.
그가 말한 ‘자기’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중심이다.
즉, 진짜 나는 하나가 아니라,
이 모든 나들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다.

가면 속의 나도, 가면을 벗은 나도,
둘 다 내 일부다.
우리는 그 사이를 오가며 조금씩 전체로 자라간다.

중요한 것은 가면을 ‘의식하는 것’이다.
문제는 가면을 쓰는 데 있지 않다.
그 가면이 나의 전부라고 믿는 순간,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

건강한 태도란 이렇다.
“나는 지금 이 가면을 쓰고 있지만, 이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이 한마디의 인식이 자아의 균형을 만든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가면을 ‘쓴다’기보다
‘조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여러 얼굴로 산다.
상황마다 다르고, 관계마다 다르다.
그건 불성실함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이 모여,
하나의 입체적인 나를 만들어간다.

페르소나는 거짓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세상과 관계 맺는 하나의 기술이다.
진짜 나란, 그 모든 얼굴들이 조용히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성숙이란, 더 많은 얼굴을 가질수록
그 안에서 길을 잃지 않는 능력이다.”





작가의 이전글디베이스먼트-순도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