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신병'이라 부르는 것들에 대하여

맑은 정신의 또 다른 얼굴

by 야옹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정신병’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그 사람의 기준에서는 오히려 가장 맑은 정신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세상은 언제나 다수의 인식에 맞춰 ‘정상’의 기준을 세운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면,
그건 비정상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 ‘정상’이란 말,
어쩌면 단지 공통된 착각의 평균값일 뿐 아닐까?

정신병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보지 못하는 색을 본다.
그들은 다른 주파수의 세계를 감지한다.
우리는 그걸 ‘환청’이나 ‘망상’이라 부르지만,
그들에겐 그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현실과 다른 파장으로 조율된,
그들만의 내적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 걸까?
그들의 세계가 틀렸다고 말할 근거는,
결국 다수의 편의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들을 병리로 규정하고,
‘정상’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그 ‘정상’이야말로
때로는 감정이 메마르고, 영혼이 닫힌 상태일 수도 있다.

칼 융은 말했다.
“무의식의 심연을 다녀오되, 거기에 잠기지 말라.”
그 말은 곧,
누구나 미칠 수 있고, 또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미친 자와 현자의 차이는 단지,
돌아올 수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정신병은 무의식의 깊은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상태이고,
깨달음은 그 바다를 다녀온 뒤,
그곳의 진실을 일상의 언어로 옮겨오는 능력이다.
둘은 그리 다르지 않다.
오히려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은 관계다.

어쩌면, ‘정신이 맑다’는 건
세상과 너무 잘 맞추는 능력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까지
느끼고 고민할 수 있는 예민함일지도 모른다.
그 예민함이 조율되지 않으면 고통이 되고,
잘 다뤄지면 통찰이 된다.
결국 그것은 같은 에너지의 두 얼굴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건 병에 대한 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감각이 닫혀 있다는 고백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정신병’이라는 단어 대신,
‘다른 언어의 의식 상태’라는 말을 쓰고 싶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우리보다 위험하지만,
그만큼 더 진실할 때도 있다.
그들의 고통을 병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에 숨어 있는 감정의 논리와 의미를 이해하려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더 사람답게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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