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많이 아는 사람이 더 똑똑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모르는 상태를 불안해하고,
아는 것을 축적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을 쓴다.
지식은 우리를 안전하게 해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한 감각이 찾아온다.
조금 알 때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는데도
오히려 내가 둔해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예전 같으면 날카롭게 반응했을 말들에
이제는 웃고 넘기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들 앞에서
입을 다문다.
이쯤 되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내가 퇴화한 걸까?”
“예전보다 덜 똑똑해진 건 아닐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장 예리했던 시절은
사실 가장 피곤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세상의 모순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의 말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 느껴졌을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싶어 했다.
그 구간은 분명 똑똑해 보였지만,
마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늘 긴장되어 있었다.
알게 된다는 것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이 알기 시작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선택을 한다.
모든 것을 다 반응하지 않기로,
모든 진실을 다 꺼내놓지 않기로.
그 선택은 겉으로 보면 무뎌짐처럼 보인다.
예전만큼 날카롭지 않고,
예전만큼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실은 그 안에
아주 다른 종류의 지성이 숨어 있다.
그 지성은
“이건 굳이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는 일이다”라고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이길 수 있지만 싸우지 않고,
설명할 수 있지만 침묵을 택하고,
모를 척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
그래서 우리는
많이 알수록 조금 바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음은
세상을 몰라서가 아니라,
세상을 너무 잘 알아서 선택한 태도다.
어쩌면 성숙이란
계속 더 예리해지는 일이 아니라,
예리함을 필요할 때만 꺼낼 수 있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항상 칼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칼을 내려놓아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어느 날,
조금 무뎌진 자신을 발견하고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상태도, 나름 괜찮다.”
그 말 속에는
포기도 체념도 아닌,
살아보니 알게 된
적당한 온도의 지혜가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