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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이야기의 영혼에 대하여 - 오페라 투란도트

by 달몰이

이탈리아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미완성 유작이자 프란코 알파노의 초연을 거쳐 프랑코 제피렐리에 의해 재탄생된 오페라 <투란도트>가 100년 만에 처음으로 올림픽체조경기장 KSPO돔에서 내한 공연을 선보였다. 특히 한국 - 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이라는 점이 특별한 의미를 더하는 이번 공연은 일찍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왔고 성공적인 공연을 통해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뮤지컬이 대화 형식에 초점을 둔 장르라면 오페라는 그러한 대사를 음악으로 표현함으로써 음악과 이야기가 결합된 음악극이다. 둘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느냐의 문제보다도 (물론 음악이겠으나) 그 둘이 이토록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마치 청각 너머로 스며들어 어느 순간 동화되는 것처럼, 그리하여 음악이라고도 이야기라고도 할 수 없는 하나의 무엇이 되어 들려오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인상 깊었다.


노래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파스칼 키냐르는 그의 저서 <음악 혐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극도로 상처 입은 어린아이와 같은 유성의 나체를, 우리 심연에 아무 말 없이 머무는 그 알몸을 천들로 감싸고 있다. 천은 세 종류다. 칸타타, 소나타, 시. 노래하는 것, 울리는 것, 말하는 것. 이 천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우리 몸이 내는 대부분의 소리를 타인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같이, 몇몇 음들과 그보다 오래된 탄식에서 우리의 귀를 지켜 내려 한다."


이러한 개념에 의하면 오페라는 그 세 가지 모두를 망라하고 있다. 심연 속에 파묻힌 우리의 알몸을 감싸고 있는 천들이 기실 하나의 뿌리로부터 나온 것이라 생각하면 대단히 흥미롭다. 노래함과 울림과 말함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실제적으로 구현한 것을 '오페라'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영혼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노래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각각 영혼을 구현하는 방식에 있어 어떠한 차이가 발견될 수 있는가에 대해 물을 수 있다.


"영혼은 음악에 저항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영혼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는다. (...) 왜 인간의 현재는 은연 중에 언어의 자리를 남겨 두는가? 인간은 문장들을 곧장 귀로 듣는다. 일련의 소리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즉시 멜로디의 형태를 띤다. 인간은 순간적이기보다 동시대적인 것에 가깝다. 그런 식으로 언어는 내면에 자리하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인간을 음악의 노예로 만든다."


위에서 드러난 파스칼의 음악에 대한 관점은 어쩌면 음악을 바라보는 하나의 일반적인 혹은 범속한 궤도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저항할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고통을 온전히 감내하는 영혼의 시간이 음악의 선율 위에서 무의식적으로 흘러갈 때 우리는 은연 중에 남겨 두었던 언어의 자리를 되새긴다. 결국 소리들은 멜로디의 형태로, 음악은 이야기로 치환되거나 착종된다. 그러한 착종은 동시대적인 것에 가깝기에, 관객들은 사랑이라는 대주제의 틀 밖에서도 시간을 초월한 무엇인가를,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무엇들이 종국에 사랑으로 귀착되었기에 관객들은 압도당한다. 류의 죽음은 노래하는 것보다 말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사랑이라는 결말을 향해 나아감에 있어 류의 죽음은 차가움을 손에 쥔 채 뜨거움으로 뻗는 과정이자 극에서 가장 중요한 고동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고백은 말하는 것보다 노래하는 것에 더 가깝다.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은 사랑의 끝은 공연장의 울림으로 대미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연장의 울림은 또한 오케스트라 박스로부터 퍼져나온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음악을 지휘하고, 청중은 그가 지휘하는 모든 음악에 복종한다. 청중은 홀로 높은 곳에 선 한 남자를 보려고 자리에 앉는다. 그는 제 마음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무리를 말하게도 침욱하게도 할 수 있다. (...) 사람들은 모두 두 손을 제 얼굴 앞에 두고 열렬히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고 소리친다."


그러나 모든 청중이 음악에 복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음악이 관객들을 노예 상태로 이끌며 적어도 그 공간에서 모든 것을 예속시킨다고 하더라도, 복종에는 분명 나름대로의 유의미한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오페라 <투란도트>는 바로 그러한 맥락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들이 노래를 통해 이야기했던 사랑 덕분에, 이야기를 통해 노래했던 고통 덕분에, 혹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음악 덕분에 나는 일종의 망아 상태 속에서 몰입 너머의 복종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실 복종은 때때로 그처럼 황홀하다.


류가 사랑을 고백하고 자결한 순간처럼, 칼라프가 투란도트를 입맞춤으로 정복하였듯이, 투란도트가 이방인의 이름은 사랑이라고 고백하였듯이.



#아트인사이트 #문화는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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