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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 '여성'으로 보는 '나폴리를 거닐다'

by 달몰이

들리는 선율은 감미롭다.


하지만 저들의 들을 수 없는 선율은 더욱 감미롭다.


그러므로 피리들이여, 고요 속에서 계속 연주하라.


더욱 감미로운 노래를, 감각적인 귀가 아닌 마음의 귀에,


음색이 없는 영혼의 소곡들을 불어달라.




-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시> 부분, 존 키츠


이번 마이아트뮤지엄의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미술관 컬렉션>은 관람자에게 들어본 적 없는 선율을 듣는 마음으로, 걸어본 적 없는 나폴리를 당대 화가들과 함께 유장히 거닐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현실적 체험의 영역에서 벗어나 불가능성과 불완전성을 동시에 암시하는 노래는 역사에 걸쳐 다양한 사람들에게 공유되어 왔다. 19세기 이탈리아 나폴리의 정서와 풍경을 포착하고 그림 속에 담아냈던 유럽의 화가들에게도,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익명의 여성들에게도, 진리로서의 미가 갖는 영원성에 천착하던 존 키츠에게도.


그림 속 아름다움에 가닿는 시선들을 한데 모아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미술관 컬렉션> 전시를 살펴보자.



시선에 관하여


살바토레 포스틸리오네의 <기도하는 수녀의 모습> 속 여성의 시선은 관람자가 확인할 수 없는 곳으로 향한다.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낙착하는지에 대해 관람자는 다만 짐작할 뿐이다.


"액자의 기능은 그림을 고립시키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액자에 의해 그림과 세계는 단절된다는 말이고, 액자 안의 세계는 상상의 세계라는 뜻이다." - <현대미술 강의>, p.70


말라르메가 역설한 회화의 물리적 경계는 액자를 기준으로 그림과 세계의 단절을 드러낸다. 그러나 <기도하는 수녀의 모습>은 오히려 액자 바깥의 세계를 상상의 세계로 남겨둠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비가시적인 것, 체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관조를 요구받도록 한다. 기도의 대상은 그녀의 신이겠으나 관람자는 단지 신 하나만을 떠올리지 않는다. 관람자에게는 나름대로의 세계가 기존에 형성되어 있고 그림은 그것의 간접적 개입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액자에 의해 그림이 고립되고 있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액자에 의해 그림과 세계가 모종의 연결고리를 가지게 되며 그때 상상력은 아름다움과 체험이라는 두 범주에 내재된 불가능성 및 불완전성으로 환원된다.



모세 비앙키의 <공포> 역시 위와 동일한 맥락에 놓여있는 작품이다. 선율이 있다는 것은 인지하되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감미로워지는 노래처럼 공포 또한 그 대상을 명확히 규정할 수 없을 때 배가된다.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미술관 컬렉션> 전시 중 일부 그림들은 초상화로 인물의 정면을 보여줌으로써 관람자와 인물의 시선이 서로 맞닿는 순간을 전제한다. 그것은 '보다'라는 층위로 남겨진다. 그러나 관람자와 인물의 시선이 조금도 일치할 수 없을 때, 인물의 시선이 이미 처음부터 다른 어딘가에 고정되어 정지된 상태로 지속될 때 관람자는 그림 속 인물을 엿보게 되며, 그것은 이전과 다른 층위의 시선을 암시한다.


액자에 의해 관람자는 그림 바깥에서 그림 내부를 상상하지만 그와 동시에 완전한 연결의 불가능성을 깨달으며 역설적으로 오롯한 단절을 겪는다.



용감한 애인이여,


그대는 절대로, 절대로 사랑의 키스를 성취하지 못하리.


그녀의 입술에 거의 접근했건만...


하지만 슬퍼하지 마라.


그녀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비록 그대가 열락을 맛보지 못했지만,


그대는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으리,


그녀는 영원히 아름다우리!




-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시> 부분, 존 키츠


여성에 관하여


에도아르도 토파노의 <죽은 새>는 영화 <디 아워스> 속 버지니아 울프와 그녀의 조카가 함께 치르는 새의 장례식, 버지니와 울프가 몸을 눕혀 죽은 새와 눈을 맞추는 쇼트와 오버랩된다. 영화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와 조카들이 모두 화면에서 사라진 뒤 오직 죽은 새의 눈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만을 담아내듯이 그림 역시 죽은 새를 향한 한 여성의 시선만을 관람자에게 던진다.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미술관 컬렉션>의 섹션들 중 2장의 이름은 '각자의 방, 각자의 세계'이다. 그림과 영화 모두 한 명의 여성을 피사체로 담아낸 것은 관람자가 그녀의 시선, 그녀의 사유, 그녀의 세계를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접하고 감상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림 속의 여성은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 이미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이때 남성은 결코 체험할 수 없었던 여성의 관점과 태도를 상상의 범주로 편입시킨다.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 전체가 뒤틀어지지 않는 선에서 내 마음속에 떠오른 그림들을 밖으로 꺼내 보이는 것입니다. 운이 좋다면, 윈저 성에서 죽은 왕의 관을 열었을 때 왕의 머리가 바스러져 버린 것처럼, 그 그림도 희미해지다 산산이 흩어질 것입니다.




-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대화 전체가 뒤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마음속에 떠오른 그림들을 밖으로 꺼내 보이는 순간 대화가 뒤틀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별을 떠나 실존하는 개인으로서 타인과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조금씩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미술관 컬렉션>에서 전시되는 그림 속 대부분의 여성들을 홀로 등장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드러낸다. 어쩌면 그것은 여성이 자신의 의지로 드러낸다기보다 관람자의 감상과 해석을 통해 다양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죽음은 침묵이라는 가장 순결한 대화의 상대가 되어 여성의 독자적이고도 자유로운 사유를 추동한다.


빈첸초 부시올라노의 <가엾은 사포> 역시 보이지 않는 죽음을 여성을 통해 그려내는 작품이다. 이때 사포는 죽음 직전 손거울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데 이는 기실 이미 죽은 새와 눈을 맞추던 버지니아 울프나 에도아르도 토파노의 <죽은 새> 속 여성과 다르지 않다.


남자들만이 가지던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여성들도 만든 것이다. 그 중심에 사포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는 남자 귀족들에게는 매우 자유롭고 이상적인 사회였지만 여타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이기도 했다. 특히 여성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 하는 수 없이 필요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모든 것이 떨어지는, 고상한 정신적 세계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열등한 존재로 푸대접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포를 중심으로 하여 여성들만이 모여 그들의 예술과 학문 세계를 만들어갔다는 것은 대단한 파격을 의미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사포 -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 서정시인>


사포는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던 문학(서정시)을 통해 자신의 이상과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때 그녀를 그림 속에 담아낸 화가는 남성이다. 남성 예술가가 그려낸 여성 예술가, 그 관계를 어떻게 조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놀랍고도 설명하기 어려운 점은 유쾌한 글을 쓰는 수필가부터 글재주가 좋은 소설가, 문학 석사를 받은 젊은 남자, 아무 학위가 없는 남자 등, 여성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런 자격도 없는 남자들까지도 성, 즉 여성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왜 여성이 남성을 향하는 것보다 남성이 여성을 향해 그처럼 더 큰 흥미를 보일까요? 그 사실이 참으로 신기해 보였고, 나는 마음속으로 여성에 관한 책을 쓰며 시간을 보내는 남자들의 생애를 그려보았습니다.


(...)


그녀에게 남성은 더는 '반대파'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녀는 남성들을 비난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지요. 지붕 위로 올라가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는 여행과 경험과 세상에 대한 지식과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을 갈망하며 마음의 평화를 깨뜨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증오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


창조라는 예술이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마음속의 여성성과 남성성이 협력해야만 합니다. 반대되는 두 성이 결혼하여 첫날밤을 치러야 하는 것이지요.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온전하고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면, 온 마음이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유가 있어야 하고,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여성이 남성을 향하는 것보다 남성이 여성을 향해 더 큰 흥미를 보인다면, 그러한 사실 위에서 사포는 더욱 단호하게 자신의 예술과 학문 세계를 형성할 수 있었고 남성들을 비난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반대파에 속할 필요가 없었다. 예술을 모방의 모방이라고 명명한 플라톤이 그녀를 열 번째 뮤즈라고 말했던 것과 더불어 콜링우드의 해석에 근거하여 플라톤의 모방은 자신과 위계를 달리하는 상위의 존재를 닮고자 하는 것(홍윤경. (2014). 플라톤의 예술론에 나타난 '모방'의 교육적 함의.)임을 고려할 때, 사포는 당대 그리스의 빼어난 남성 문인들을 모방하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여성성과 남성성의 협력을 통해 창조라는 예술을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비단 사포 뿐 아니라 그 어떤 여성이라도 남성만의 위계와 질서로부터 탈각함으로써 오히려 남성성을 내적으로 획득하고 본래 지니고 있던 여성성과의 조화를 꾀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가엾은 사포>의 사포는 더 이상 가엾게 보이지 않는다. 손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죽음을 앞둔 자의 두려움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창조에게 온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는 담대함이다. 자유롭지 못한 죽음도, 평화롭지 못한 죽음도 아닌 자신만의 방과 세계를 담아내는 그녀의 시선이 도달해 맺히는 곳마저도 관람자가 확인할 수 없는 시공간이기에 차라리 화가와 관람자 모두 범접 불가능한 그녀만의 무엇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대 침묵의 형상이여,


너는 영원이 그러하듯이:


끊임없이 자극하며 우리의 생각을 끌어내는구나.


차가운 목가여!


늙음이 이 세대를 황폐케 할 때,


그대는 우리의 고뇌와는 다른 고뇌의 한복판에서,


인간에게 친구로 남으리, 그리고 말하리,


"미는 진리요, 진리는 미"라고 - 이것이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아는 전부이고, 알 필요가 있는 전부니라.




-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시> 부분, 존 키츠




#아트인사이트 #문화는소통이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7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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