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에서 11월 7일부터 30일까지 선보이는 블랙코미디 연극 <트랩>은 스위스의 극작가 프레드리히 뒤렌마트의 단편소설 <사고>를 원작으로 한 법정극으로, 2024년 초연 당시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트랍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네 명의 전직 법조인들과 한 명의 가사도우미가 이끌어가는 하룻밤의 저녁 만찬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 <트랩>은 출장 중 발생한 우연한 자동차 사고와 우연히 시작된 재판 놀이로부터 시작되어 주인공의 자살로 결말을 맺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연극 <트랩>은 블랙코미디와 부조리극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인물 설정과 연출이 돋보이고, 저녁 만찬 중 벌어지는 모의 재판을 통해 한정적인 상황과 조건 속에서 흥미로운 대화 양식과 전개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한편으로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아쉬운 지점들이 더러 존재했으며 극이 진행되는 동안 기저에서 줄곧 준동했던 그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으로 하나의 인물이나 장면에 국한해서 풀어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따라서 이를 조명 가능한 서로 다른 비판적 관점들을 제시함으로써 보다 다양한 층위의 해석을 유도하고자 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프리드리히 니체의 <안티크리스트>,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연극 <트랩>이 이들 각각과 어떠한 구조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고 특히 모의 재판이라는 특수한 상황 설정이 각 작품이 사유하는 법과 도덕, 범죄 등의 본질적 장치와 맞물려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밝힌다면 그로부터 나름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소송>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소송>과 프레드리히 뒤렌마트의 단편소설 <사고>가 갖는 구조적 유사성은 노골적이다.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발이 묶여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남자 주인공,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법조 집단 내지 체계, 인간에게는 반드시 어딘가 죄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 및 전제, 결말부에서 주인공이 겪게 되는 파멸 등 두 작품은 플롯의 핵심적 요소들을 공유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요소들은 동시에 결정적인 차이를 현시한다. 우선 <소송> 속 '요제프 K'의 죄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명시되지 않으며, 법원이라는 추상적 공간은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는 적으로서, 하나의 허구적 신화로서 기능한다. 이는 인간의 선험적인 유죄와 그를 향한 일련의 소송 과정이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관류한다는 것을 보임과 동시에 누구도 그 실체를 명시하고 확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의 죄와 벌을 둘러싼 보편적 접근이 수반하는 공허함과 부조리함을 사실상의 체념 상태에 이를 정도로 반복해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요제프 K'의 죄를 기독교에서의 원죄와 동일시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겠으나 그럼에도 양자의 서사가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소송>은 이러한 지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지나치게 모호하고 난해한 법령 속에서 인간의 구원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점과 더불어 법원이라는 구조가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조성하고 죄책감을 영구화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성당 신부의 비유담인 '법 앞에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 가능하며 무죄 판결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인간의 구원은 끝없이 유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연극 <트랩>은 트랍스의 죄목을 구체적이고도 단정적으로 제시한다. 트랍스가 자신의 상사가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부인과 간음하여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은 한밤중의 재판 놀이를 통해 내밀하고도 추악한 죄로 드러나지만 동시에 성공한 중산층 남자의 양심고백과 자성이라는 형식 속에서 하나의 도덕적 질문으로 단순화된다. 저녁 만찬이라는 기회를 통해 재판 놀이를 주도하는 전직 법조인들의 대사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듯이 인간에게는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숨겨진 죄가 있으며 더 나아가 재판 놀이는 언제든지 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연극 전개의 핵심축이다. 그러나 이는 <소송>이 독자로 하여금 무엇이 죄가 되는지 알지 못하도록 만듦으로써 법의 실체를 묻게끔 추동하는 것과 상반되는 지점으로, 오히려 무엇이든 죄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하면서도 동시에 그 죄를 단순한 도덕적 질문과 결부시켜 '우리는 트랍스와 같이 의식하지 못한 채 죄를 짓고 살아가는데 과연 우리는 깨끗한 인간인가?' 따위의 의문점으로 범위가 좁혀지도록 재판 과정을 방치하는 것이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의 경우에도 피고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몸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다른 종류의 단점입니다. 소송은 적어도 그럴듯한 이유가 없는 한 가만히 멈춰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볼 때 소송에서 무슨 일이든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저런 지시들이 내려져야 하고, 피고인은 심문을 받아야 하며, 심리가 행해지고, 그 밖의 또 다른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소송은 인위적으로 제한해놓은 작은 범위 내에서 계속 맴돌아야 합니다.
- 프란츠 카프카, <소송>, p.198
분명 연극 <트랩>은 한순간도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없는 트랍스를 인위적으로 제한해놓은 작은 범위 내에서 심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에 대한 형벌로서 주어지는 트랍스의 자살이 부조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자행되는 불합리한 소송의 성격을 '법원'에서 '요제프 K'로 옮겨놓았음에 더해, 법의 주체를 표면적인 개인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소송>에서 법의 집행과 책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것처럼 묘사되며 법조인들은 사실상의 주체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 <트랩>에서 등장하는 전직 판사, 검사, 변호사, 사형집행관은 소송 절차를 일종의 놀이처럼 다루며 한층 더 잔인해진 폭력의 이면에 감춰진 본질, 예컨대 법의 주체를 향한 근원적인 질문을 모호하게 만든다. 연극이 한정된 러닝타임 내에 한 인간의 유죄 판결과 양심 고백을 다루고자 했다면, 당사자인 트랍스는 물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을 직간접적으로 주도하는 은퇴 법조인들까지도 보다 더 입체적으로 설정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트랍스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보다도 중요한 것은 죄와 더불어 법을 집행하는 구조의 정체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소송>과는 다른 형식으로, 연극만의 언어와 호흡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안티크리스트>
모든 건강한 형태의 삶을 희생함으로써만 번영하는, 기생충 같은 인간인 사제가 신의 이름을 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제는 자신들이 만사의 가치를 정하는 상태를 '신의 나라'라고 부른다. (...) 사제만이 '구원해준다'. 심리학적으로 고찰할 때, '죄'란 사제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죄는 권력의 진정한 지렛대이며, 사제는 죄에 의지해 살고 사람들이 '죄짓는 것'을 필요로 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p.65~67
신이 사라진 자리를 법이 대신할 때, <소송>에서 등장하는 비유담 '법 앞에서'의 문지기는 법의 실체화와 무죄 판결의 가능성을 유보하여 궁극적으로 허구화하는 존재이며, 사제란 그럼에도 그 문을 향해 끊임없이 다가가고, 두드리고, 절규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속삭이는 존재다. 현대 사회의 인간은 그러한 문을 주체적으로 두드리거나 열어젖힐 수 없으며 다만 독점적 중개자인 사제, 즉 법조인의 개입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법조인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유죄 여부를 판단하기에 앞서 사제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개인의 죄를 필요로 하고,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를 희구한다. 더는 고해성사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제로부터 고백을 강요받는다.
그러한 이유로 <트랩>의 재판 놀이는 세속화된 사제 집단의 세속화된 죄책 구조로 전락한다. 그들이 은퇴한 후에도 개인을 향한 재판을 멈추지 않는 것은 <소송> 속의 법원이 다양한 층위에서 변주되어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누구나 고백할 것이 있고 그로부터 죄를 하나쯤은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는 그들의 확신은 <안티크리스트> 속 죄책감을 조직하여 허구적 질서를 유지하는 사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때 니체는 이러한 죄책감의 담론을 해체하여 근본적인 양심의 가책과 노예도덕의 원인을 사제에게서 찾는다. 상사의 여자와 간음하여 상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그것이 죄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나 얼마나 중대한 죄인가의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왜 그와 같은 죄의 규정과 소송 절차가 개인과 집단의 관계 속에서, 익명성의 구조 속에서, 병리적인 죄책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의 지점으로 확장되거나 좁혀진다. 그렇기에 <트랩> 속 트랍스의 자살은 '우리 모두는 유죄다'라는 사제의 논리 앞에서 다시금 공허해질 뿐이다. 타인의 인생을 저녁 식탁 위에서 술안주 삼아 해부하고, 언뜻 재치를 더한 것처럼 보이지만 잔혹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어 한 개인을 벼랑까지 추문하며, 자신들의 서사 속 일부를 채워 넣는 사제이자 법조인이었던 그들에게 자살이라는 결말을 통해 확답을 영원히 유보하는 인물의 전형은 결국 도덕적 냉소로 미끄러지고 만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에게 일종의 배심원 역할을 부여하여 각자의 죄책을 되돌아보게끔 만들고자 하는 연극의 연출은 힘을 잃는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전체주의와 홀로코스트의 역사 속에서 담지하는 정치철학적 명제는 무사유가 유죄라는 것이며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때 <트랩> 속에서 포착되는 무사유는 누구에게 귀착되는가? 은퇴 이후 삶의 무료함을 덜어내고자 시작한 재판 놀이는 사제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퍼포먼스이며, 우연히 한 개인을 기소하고 논박함으로써 도덕적으로 파괴하는 재판의 형식은 <소송>에서 드러나는 법의 허구적 구조와 함께 사제라는 존재의 악의 평범성을 지운다. 이때 아이히만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구체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은 사라지고 '우리 모두는 죄인이지 않을까?'라는 단순할 정도로 비정치화된 형식적 질문이 무대를 유령처럼 떠돈다.
<트랩>이라는 연극은 처음부터 트랍스의 죄가 아니라 전직 법조인들의 재판 과정과 그들의 존재론적 정당성이 더욱 중심적으로 부각되어야 하는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다소 형식적인 재판의 전개와 트랍스의 자살이라는 결말은 더는 작품이 스스로 사유의 확장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한나 아렌트의 관점을 고려할 때, 연극이 보여주는 것은 한 인간의 죄가 드러나는 과정 속 죄책감과 양심의 고백, 심리 절차와 형벌의 연결고리일 뿐, 이면에 감춰진 악의 구조를 비판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했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단지 한밤중의 배심원 놀이를 소비하며 그것에 참여했다는 느낌만을 남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 사회가 무사유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은 자와 아직 유죄 판결이 유보되고 있을 뿐인 자로 구분될 뿐이라면 무사유를 벌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퇴색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연극 <트랩>이 관객에게 남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연극을 관람한 관객 모두가 유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요제프 K'의 사형과 '트랍스'의 자살 사이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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