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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시즘, 음험한 사회 너머로' - 리얼 뱅크시

by 달몰이

당의정설.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가 <자연계>에서 처음으로 주장한 문학관으로, 문학의 쾌락적 요소는 유익한 교훈적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관점이다.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이러한 문학의 수단과 목적으로서의 기능에 대한 양가적 태도는 곧 전반적인 예술의 범위로 확장된다. 우리는 하나의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반드시 어떠한 교훈을 얻어야만 하는가? 혹은 예술이 암시하고 유도하는 비판적 담론과 사회적 메세지는 무시한 채 껍데기의 미학만으로 만족을 느껴도 괜찮은가?


표면적으로는 뱅크시가 당의정설의 편에 서있는 예술가임이 자명하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고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실제로 전시회 '리얼 뱅크시 (REAL BANKSY : Banksy is NOWHERE)에서 관람할 수 있었던 뱅크시의 그림들 대부분은 사회풍자적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했고 자본의 어두운 이면에 표류하는 폭력과 차별의 현장을 고발했으며 시민들의 사회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나름의 방향성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뱅크시라는 사람과 그의 그림들은 그가 비판하는 사회만큼이나 음험하다. 그는 자신의 인적 사항을 철저히 감추면서도 그림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사회의 민낯을 폭로하며,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 역시 창조의 욕구다'라는 말처럼 파괴의 창조의 작업을 동시에 수행한다.


뱅크시의 그림은 그러한 이유로 수단이자 목적이며, 그의 작품에서 교훈을 읽어내는 순간에도 교훈으로부터 멀어진다고 느꼈다. 그가 세상에 작품을 공개함으로써 의도한 교훈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포인트들을 짚어가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 음험한 사회로 나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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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의 존재는 뱅크시와의 그림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난 갤러리 전시, 제대로 된 갤러리에서의 전시를 하고 싶지 않다고 결심했고, 내 작품을 더 정당하게 만들기 위해 갤러리에 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요. 술집에 가서 누군가 제 작품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맥주 한 잔을 사거나 제 작품을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작품의 가치는 돈에 있지 않아요." - 1995년 뱅크시 인터뷰


흥미로운 점은 뱅크시가 자신의 웹사이트 혹은 SNS를 통해 자신의 예술작품을 공개하고 나서야 그것이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뱅크시 본인이 반권위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고 하더라도 관객들은 과연 뱅크시의 그림을 관람하고 있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 그의 이름값을 관람하고 있는 것인지 모호하다. 뱅크시가 그의 작품들이 거액으로 거래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또한 그의 서명이 들어간 그림이 다른 그림들보다 더욱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그저 하나의 사실로 방치하고 있다는 것 역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교훈으로부터 멀어지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갤러리 역시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현대 미술에서 갤러리의 기능은 단순히 그림들을 전시하고 나열하는 하나의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의 배치, 관람객들의 동선, 전반적인 시설 구조, 작품 감상 구도 등의 효과를 통해 한 예술가의 작품을 더욱 작품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갤러리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길거리에 아무렇지 않게 그려진 뱅크시의 그림이 하나의 작품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소 화면으로만 보았던 뱅크시의 그림이 갤러리로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되어 다가온다. 뱅크시에게는 정말 갤러리가 필요하지 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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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디즈니랜드의 미키마우스와 그것의 변형인 디즈멀랜드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이 실재이고 원형인가? 무엇이 모방이고 복제된 이미지인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절규하는 소년의 양 손목을 붙잡고 미소를 지으며 함께 나아가자고 말하는 미키마우스와 로날드 맥도날드인가? 왜곡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폭력성을 풍자하며 새롭게 탄생한 디즈멀랜드 속의 음울하고 비틀린 세상인가? 그 어느 쪽도 환상이며 파생일 것이다.


뱅크시가 디즈니랜드라는 시뮬라크르를 풍자하고 폭로하기 위해 디즈멀랜드를 기획했더라도 그것을 수용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과연 디즈멀랜드를 방문하여 입장료를 지불하고 관람하는 행위는 실재와 원본을 소비하는 행위일까? 가면을 들추고 나면 진실이 있다는 생각마저도 허상일지 모른다. 시뮬라크르 개념만이 아니라 그 어떠한 반자본주의적 비판 이론들도 자본주의의 진정한 안티테제가 되지 못한 것처럼. 제도 비판 미술을 하고 예술의 자본화에 대해 비판했던 뱅크시의 작품 '풍선과 소녀'가 한화 약 304억 원에 낙찰된 것처럼. 'EXIT THROUGH THE GIFT SHOP'이라는 문구를 지나 '선물 가게'를 들어가게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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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뱅크시라는 예술가에게서 반드시 교훈을 찾아야 할 필요도, 교훈을 애써 무시할 필요도 없다. 그는 아직 음험한 사회 너머로 나아가지 못한 채 여전히 혁명을 꿈꾸고 있다. 사실 혁명가는 교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람객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비판적 시각으로 전시장에 들어와, 뱅크시의 생각을 구경하고 전시를 기획하고 주최한 사람들이 적어놓은 설명을 구경하면 될 것이다.


다만 예술작품의 교훈에 천착하는 사람이 교훈을 얻지 못했을 때나 혹은 자신이 생각했던 교훈이 부정당했을 때 그는 불안해진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 듯하다. 혁명은 또한 불안한 것이니까. "예술은 불안한 자들을 편안하게 하고, 편안한 자들을 불안하게 해야 한다."라는 뱅크시의 말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교훈을 얻어 편안해지기보다, 계속해서 불안해하며 뱅크시라는 예술가의 자취를 따라가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다보면 음험한 사회 너머에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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