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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보았다.

by 이문웅


아침부터 페이스북이 뜨거웠다. 청와대 출입기자로 오래 알고 지내온 지인이 좀처럼 하지 않던 비판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현 정권 실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배경으로.


그는 “이완용이든 이승만이든, 일본이 강할 땐 일본에, 미국이 강할 땐 미국에 빌붙었다”는 표현을 썼다. 자칫 보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본질적인 오류가 있다. ‘일본이 강했기 때문에 빌붙었다’는 단순한 도식은 역사를 감정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당시 조선은 이미 국가의 위기를 넘어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고종과 민비, 그들의 척족들, 그리고 그 곁에 기생하던 관리들은 부정부패로 국가를 좀먹고 있었다. 외세는 그 틈을 파고든 것이다. 열강들은 자본이라는 사탕을 들이밀었고, 일본은 가장 먼저 움직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이 은행을 세운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근대화에 대한 기본 지식조차 없는 상태에서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받아들였고, 그 금액은 해방 전까지 지금의 수백조 원에 달한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민족주의 시각만으로 보면, ‘강자가 약자를 침탈했다’는 서사로 쉽게 압축된다. 하지만 진실은 더 복잡하다. 내부에서 먼저 무너졌고, 우리가 자초한 부패가 외세의 침투를 가능케 했다는 뼈아픈 진실은 좀처럼 말해지지 않는다. 인정하면 마치 조국을 배신하는 듯한 죄책감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내가 내게 묻는다. “생각이 바뀌지 않는데 어떻게 진실을 알 수가 있니?” 마음이 웃는다. 그렇다. 진실은 감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이미 정해둔 결론을 진실이라 믿는 사람에게, 역사는 언제나 편집되고 왜곡된 채 반복된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역사를 ‘위로’로 소비하고 있다. ‘우리는 늘 옳았고 피해자였다’는 말은 위안이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통찰도, 성찰도, 미래도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위안이 지금의 외교적 혼란, 정체성의 혼돈, 교육의 방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외세 앞에서 유연하지 못하고, 국민 여론이 언제나 감정에 따라 요동치는 것은 이런 역사 감정 교육의 부산물이다.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실리를 따지기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정치가 반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가 역사를 장악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감정을 선동하느냐가 정치를 좌우하게 된다.


이렇게 감정 위에 쌓은 역사 위에는 성숙한 외교도, 건강한 자존도 자랄 수 없다. 사실을 말하면 ‘친일’, 비판하면 ‘보수’ 혹은 '수구'라는 낙인이 일상화된 사회에선 진실은 점점 더 외로워진다. 서로의 낙인을 두려워하며 입을 닫고, 그 침묵 속에서 진짜 역사의 교훈은 사라진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불편한 진실을 직시할 용기에서만 새로운 자존감이 태어난다는 것을. 이완용을 미화하자는 것도, 이승만을 덮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어떤 시대, 어떤 조건 속에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정확히 보자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길이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진실을 피한 채 살아가는 사회는, 결국 또다시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게 된다.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다.


“진실은 싸늘하지만, 그 싸늘함 속에만 너를 뜨겁게 하는 지성이 숨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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