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편-
2024년 말 완전히 소진된 에너지와 모두를 슬픔에 잠기게 한 비보로 한 해 마무리 글도 못 쓰고 어찌하다 2025년 새해를 맞았다. 쳇바퀴 같던 일상을 지내다가 올빼미형이라 늘 부족했던 잠도 충분히 자보고, 저녁을 먹고 책을 펼칠 수 있는 여유를 찾을쯤 벌써 2월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몇 년 전 또는 작년부터 시작한 것들로 성장한 과정에 대해 간단한 자기 보고서 같은 것으로 정리한 후 3월을 맞이하고 싶다, 또 어떤 것에 대해 시작을 망설이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써 본다.
몇 년 전과 작년에 자기 계발을 위해 시작한 것이 세 가지 있는데 바로 그림과 플루트 배우기 그리고 필라테스이다. 먼저 드로잉은 4년 전부터 주 1회 직장으로 찾아오는 강사님께 배우기 시작했는데 작년에 4년째 되었다.
어릴 적 교사인 아버지의 전근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는데 하필 무척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하루에 버스가 두어 번 다니는 두메산골로 이사를 갔었다. 학원이라는 곳과는 담쌓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리도록 운동장과 학교 풀밭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니고 봄과 여름에는 찔레순이나 오디를 따 먹고 가을에는 파란 하늘 가득한 고추잠자리 떼를 보며 메뚜기를 잡으러 다녔다. 6학년 때 도시로 전학 오니 이미 도시 아이들은 많은 것들을 배웠고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 내 마음에는 항상 그 시기에 못 다닌 학원들 중 특히 미술과 음악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결혼 전에 그림과 플루트, 피아노를 취미로 짬짬이 배우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14여 년 정도 쉬니 다시 실력이 리셋이 되었다. 원래 집안 유전자에 예술자의 끼를 찾아볼 수 없으니 진전 없는 실력에도 다시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4년 전 직장 선배가 만든 동아리에 드로잉 강사님을 초빙하여 직장 내 동아리에 참여하게 되었고 주 1회 그림을 그리다가 2년 전 직장을 이동하니 막상 배우던 것이 끊기게 되어 너무 아쉬웠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고 직장 내 소통방을 통해 같이 그림 그릴 분을 모집했고 8분 정도가 모집되었으나 중간에 나간 사람들을 제하니 최종 소수정예 4명이 정규멤버가 되어 2년 동안 운영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대지망생, 이미 취미로 그리고 계시던 분 등 실력이 출중하셔서 놀랐다)
수채화 강사님이 매주 화 방문하시어 2시간 동안 지도해 주셨고 직장 내 행사가 있는 때를 빼면 2년간 모두 출석률이 우수했다. 사실 4명의 수강료를 모아도 강사님 한 달 기름값 정도밖에 안 되는 거 같은데 인품이 훌륭하신 강사님이 우리의 열정을 예뻐해 주셔서 적은 수강 인원에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나 화요일마다 방문해 주셨다. 희한하게 강사님 오시는 날만 비가 퍼부었고 어느 날에는 절대 안 늦으시는 분이 시간이 지나도 안 오셔서 보니 역시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이었다. 가방까지 다 젖은 채 헐레벌떡 오신 강사님의 가방을 닦아드리며 얼마나 송구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지역 내 기여도가 인정받아 2023년에는 청주시민상도 받으셨다. (실력과 인품이 최고이신 이문숙 선생님 존경합니다.)
그림은 강사님이 어반스케치팀도 이끌고 계셔서 직접 찍은 사진이나 인터넷에 구하신 풍경 사진을 그리는 것인데 A4용지 사이즈 이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큰 그림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러다 보며 취미가 다시 일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회원들 중에 손이 빠른 분들이 많아 일주일 내에 완성하시니 나도 주말에 꺼내서 하게 되는 과제가 되었지만, 완성되었을 때 회원들 카톡방에 완성본을 올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먼저 시작하자, 이제 다른 분들도 완성본을 조심스레 올려주셨다. 올린 후에는 "확대 금지~", "준비물을 놓고 와서 붓 한 개로 그려서 상태가 좀 그래요" "자꾸 칠하다 보니 색이 탁해졌네요" 같은 멘트로 먼저 부담을 덜고, 그림에 대한 자랑은 아니고 완성한 것에 대한 인증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주말에 그림만 딱 업로드되어도 아래 하트와 엄지 척 이모티콘이 붙고 따뜻한 찬사가 이어진다.
"하늘빛이 멋지고 나무도 살아있는 거 같아요. 산속오두막 맑은 공기의 겨울 아침이 느껴져요." "색변화가 너무 멋져요 하늘색도 예쁘네요." "그림이 점점 멋져져요. 나무랑 물이랑 정말 예쁩니다." "와 이제 작가님이라 불러드려야 될 거 같아요 원본 아닌가요?^^"
물론 우리끼리의 자화자찬일 수 있지만 우리들은 행복했다.
2023년 초기 졸작들 풋풋한 맑음? 이 있다.
계절 따라, 시기별 분위기 따라 이것저것 그리는 것도 다양하여 동아리 이름도 '다 그림'이다.
사실 이것보다 그린 그림이 더 있다. 올리고 보니 그림 양이 의외로 많다. ^^
사실 시간 여유가 많아 그림을 시작한 건 아니다.
내일까지 낼 결재서류가 있어도 동아리 시간은 가급적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려면 일을 더 빨리 처리하거나 남아서 해야 했다. 오늘은 일 때문에 , 오늘은 아파서, 오늘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이런 식으로 빠지다 보면 어떤 취미나 자기 계발도 흐지부지된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동아리활동 후 직장에 늦게 남아서라도 일을 처리하고 갔다.
어떤 날은 학부모 상담전화를 받느라 어떤 날은 우리 아이가 아프다고 하며 친정엄마께 부탁하고 학원 등에 못 간다는 문자 보내기 등 해결해 주느라 동아리 시간이 반이나 지나갔다.(회원들이 이쯤 되면 전화올 타이밍인데 안 와서 허전하 다할 정도였다) 역시 워킹맘에게 자기 계발이란 녹록지 않다. 또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힘든 날도 집에서 붓을 잡고 그리 다보며 금요일 토요일은 새벽 1시가 될 때가 있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며 시련들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된 것 같다.
이 그림들을 내교실 책상 뒤에 붙여놓으면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와서 감상하며 "진짜 선생님이 그린 거예요? 완전 화가세요" 또는 나는 이 그림이 좋아, 나는 저 그림이 좋다고 가리킬 때 작은 기쁨을 느꼈다. "너희는 크면 더 잘 그릴 거야." 하면 "아뇨 저는 절대 저렇게 못 그려요." 하며 나를 띄어주는 녀석들이 사랑스럽다. 고학년 선생님들은 배운 것을 미술수업시간에 수채화지도에 활용하셨고 저학년 선생님들은 물감 대신 파스텔 등 도구로 수업지도에 활용하셨으니 선순환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내 그림 실력은 내가 잘 안다. 이 그림으로 작가가 될 리도 없고 그림으로 수입을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다. 노년에 내 돈으로 작은 공간을 대관하여 가족들과 지인초대 작은 전시회쯤 할 수 있으려나? 난 그냥 화지를 펼치고 팔레트를 놓고 물통에 물을 받아놓고 그리는 그 시간이 좋다. 하다가 쉬면서 커피 마시고 또 그리다가 잠시 간식도 먹고, 안 되는 날은 접고 다음에 하기로... 그냥 그리는 행위 자체가 오롯이 나를 위해 할애하는 시간이라서 좋다. 같은 동아리회원들에게 말했다. 1년 지나고 보니 남은 건 그림뿐이네요라고. 직장에서 한 나의 일들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고 보이지 않게 성과가 있었겠지만, 어쨌든 여행에서 사진만 남는다는 말처럼 일 년의 나의 성과는 기억과 추억 속에 남고 그림은 차곡차곡 내 손에 모아지게 되었다. 그림 그리면서 또 하나의 변화는 계절마다 변하는 나무의 색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무는 겉부터 색이 변하여 나무의 중심까지 물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이때 발견했다. 또는 퇴근하면서 석양 하늘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며 무슨 색으로 칠하면 저리 될까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1,2월에는 동아리 활동을 쉬게 되었고 올해는 동아리가 운영될지 불투명하다. 회원 중 일부가 직장 이동을 했기 때문이다. 동아리가 쉬는 동안 동네 화실의 문을 두드렸다. 몇 년 동안 그 앞을 지나다니며 안을 기웃기웃 들여다보던 곳이다. 굽실굽실한 은발 머리가 멋있는 남자 원장님이 계신다. 나처럼 몇 년 동안 망설이다가 온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다. 즉 그렇게 지나다녀도 몇 년 만에야 인연이 된다고 하신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창가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화판 앞에 앉으니 머릿속 온갖 잡동사니가 사라진다.
평소 안 해보았던 애니메이션 그림을 선택했고, 과슈물감(불투명수채물감)도 구입하여 주 2회씩 1시간씩 어떤 때는 스케치만 하고, 어떤 때는 사람 옷만, 어떤 때는 풀잎만, 어떤 때는 구름만 색칠하고 왔더니 3주 만에 완성했다.
마녀배달부 키키 애니메이션은 못 보았지만,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언덕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주인공의 모습이 잠시 한숨을 돌리고 쉬고 있는 나 같기도 하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지만 먼 곳을 응시하며 또 2025년을 살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는 나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