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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밥 예찬

-흰밥 먹고 싶은 날

by breeze lee Jan 13. 2025

  남편이 유럽으로 출장을 갔다. (주방에서 설거지하다 잠시 멈추고 신세한탄 와~ 부럽다) 첫째 아이는 지난 금요일 방학을 했고 둘째는 지난 여름 학교 공사로 여름방학이 길었던지라 22일까지 등교한다. 그러다 보니 밥이 애매하게 한 그릇 남았을 때 밥을 새로 해야 하나 아니면 한 그릇을 둘이 나눠 먹게 하고 나는 다른 걸 먹을까 고민에 빠진다.(첫째는 고기파로 탄수화물은 한두 숟갈 나머지는 고기로 배를 채운다.) 그런 식으로 며칠을 부족한 밥은 사 두었던 즉석 현미밥으로 보충했다.

  첫째가 토요일마다 다니는 축구학원에서 데려 오고 집안 일 하다 보니 거의 1시가 되었고 아침 내내 쫄쫄 굶은 사실이 떠올랐고 그러자 배가 너무 고팠다. (배 앞가죽과 뒷가죽이 붙은 느낌이 이런 거구나)

오랜만에 작은 양푼을 들고 뒷베란다로 가서 흰쌀을 담아왔다. 깨끗하게 씻어 정수기 뜨거운 물에 불려 놓았다. 밥 하는 게 최근 남편이 주로 했던 일이라 오랜만에 하는 일인 양 씻을 때마다 뽀얀 물의 색이 옅어지는 것이 재미있었다.( 저 밥 잘합니다 최근에만 뜸했을 뿐이죠 ) 따뜻한 물에 담가놔서 15분 정도 불리니 쌀알이 조금 통통해진 거 같다. 물이 많은 것 같아 따라내고 압력솥뚜껑을 닫고 가스 불을 켰다.


  엄마는 일찍 출근하는 딸을 위해 아침마다 아이들 등교를 봐주러 오신다. 둘째가 중학년에 접어들어 안 오셔도 될 법한데 나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내가 출근한 다음 아이들이 어떻게 하고 가는지 미덥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7시쯤 되면 현관문이 드르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추워진 날씨에 서걱대는 점퍼 벗는 소리와 "오늘 엄청 춥다 오늘은 긴 패딩 입고 가라'는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나는 안방에서 출근 준비로 한창이다. 그러다가 중간중간 나와 아이들 입을 옷도 내놓고, 아침으로 먹을 것도 찾아 내놓기도 한다.


  밥이 애매할 때 현미 즉석밥을 내놓으면 "내가 지난번 방송(주로 아침 마당 및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요즘은 채널이 많아져 온갖 건강정보 방송이 많다)을 보니 유명한 의사가 나와서 말하는데 흰밥이 나쁘다고들 알고 있는데 그거 아니라더라. (중간 생략 어디가 좋은지 잊어버림) 현미밥은 아이들에게 소화가 안 되고......" 이쯤이면 나는 아 네... 하고 백색소음처럼 들으며 한 귀로 흘러 버릴 생각을 한다.

(흰밥 생각: 나는 언제부터 건강의 적이 되었는가? 당뇨, 혈당스파이크... 흰밥 억울) 


 물론 엄마도 조와 귀리 등을 시장에서 사 와서 통에 섞어 딸들에게 택배로 부쳐 주시며 건강 관리에 힘쓰라고 하시는 세상 돌아가는 건강 지식에 밝은 분이시긴 하다. 그런데 아직도 생일날은 꼭 흰쌀밥을 지어주시는 분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향수 때문인가 생일날은 아무것도 섞지 않는 뽀얀 흰쌀밥을 먹는 게 언젠가부터 우리 집 문화가 되었다.

  생일날 김이 모락 나는 흰쌀밥과 쇠고기 미역국은 신랑 신부처럼 나란히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백일날 아무것도 안 넣은 백설기떡을 먹듯 흰쌀밥과 쇠고깃국 앞에서 다시 태어난처럼 경건한 마음이 든다.


  최근 건강에 관심이 많아 현미밥과 잡곡밥을 선호하던 내가 이날은 흰쌀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 한해 말 크리스마스, 12월 31일, 그리고 신정 등으로 파스타, 빵, 떡만둣국이 식탁에 자주 올라왔기 때문이기도 한 듯하다.

  드디어 뜸을 다 들이고 압력솥뚜껑 단추가 사뿐히 내려와 있었다.(사실 이 시간이 길지 않으나 배가 고플 때는 무척 길게 느껴진다 ) 부드럽게 달칵 압력솥뚜껑이 열릴 때 기분이 참 좋다. 억지로 김을 뺀 것이 아닌 충분히 뜸을 들여 잘 익었다는 증거이다. (사진을 남기려다 이까짓 거 무슨 사진이냐 하고 못 찍은 게 아쉽다)

  뚜껑을 여니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쌀밥이 눈밭처럼 펼쳐져 있다.(길고 윤기 없는 동남아 안남미와 다른 우리나라와 몇 동양권 나라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일 것이다) 수돗물을 틀어 주걱에 물을 묻히고 중간을 훑어 길을 만들고 이리저리 뒤집는다. 오후에 갈 때가 있는 둘째 밥을 먼저 공기에 소복이 담았다.(첫째는 벌써 친구랑 시내로 놀러 갔다) 뜨거운 계란찜과 친정어머니가 해 놓으신 콩가루 넣은 냉이 된장국, 삼겹살 구이, 김 몇 조각을 반찬으로 곁들여 놓았더니 놀러 나갔다 온 둘째가 호호 불어 가며 맛있게 먹는다. 이 날은 흰쌀밥이 주인공이다. 허기가 졌는지 허겁지겁 먹는 둘째 등을 주방에서 바라보며 이 엄마는 흐뭇하다. 자 그럼 이제 나도 한 그릇 떠서 먹어볼까?

▲ 제22회 이천쌀문화축제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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