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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팥죽, 엄마 그리고 호랑이

-동지와 팥죽 오래오래 동지 하자

by breeze lee Dec 30. 2024

  얼마 전 교실에서 연극활동을 했다. 회의를 통하여 2학기 현장학습을 대신하여 연극강사를 학교로 초청하여 학생들에게 연극활동의 경험을 하게 해 주기로 하였다.

무지개 물고기, 흥부놀부를 하면서 처음에 쭈볏쭈볏 부끄러워하던 아이들도 세 번째 연극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에서는 서로 배역에 대한 욕심을 내며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할머니 역할을 서로 하려고 하여 가위바위보를 하도록 했는데 한 명이 못하게 되어 눈물을 쏟았고 달래주느라 애를 먹었다. 다음 체육놀이에 대장을 시켜주어 가깟으로 웃으며 하교하였다.(할머니 2명)

 그런데 나도 이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정겹고 좋을까? 또 듣고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이 아가였을 때 자기 전 옛날 옛날에~ 스토리 중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이야기 중 하나이다. 아이도 좋아했지만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재미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이 이야기의 단연코 재미는 여러 사물들이 나와 호랑이를 골탕 먹이는 대목이다.

동화책마다 사물은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대체로 소똥, 밤, 자라, 지게, 멍석, 맷돌 등이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이야기를 알기 때문에 이야기는 생략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할머니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뻔할 때 호랑이에게

"호랑아 내가 동지에 팥죽 쑤어줄 테니 그거 맛보고 날 잡아먹으렴~." 하는 장면이다.

 

  팥죽이 얼마나 맛있는 음식이었으면 호랑이는 입맛을 다시며 돌아간다. 나는 그래서 우리 동화 속 호랑이가 좋다. 어수룩하고 뭔가 빈구석이 있고 이리저리 당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때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토끼에게 속아 뜨겁게 달궈진 돌떡을 먹고 구르는 호랑이, 토끼의 꾀에 속아 구덩이에 다시 들어가는 호랑이, 팥죽할머니와 호랑이 속에서 팥죽과 할머니를 잡아먹으러 어슬렁거리며 내려왔다가  여러 사물에게 두들겨 맞거나 넘어지며 호되게 당하는 호랑이...


그래서 동지 하면 나는 호랑이도 떠오른다. 물건들도 할머니의 팥죽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한 그릇 뚝딱 먹고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주러 각각의 위치로! 간다. 그러고 보면 이 작전의 일등공신은 팥죽이다.


    며칠 전 안방 욕실에 들어갔다가 거울에 얼룩을 발견했다. 아이들이 코피를 흘렸나 얼굴 클렌징 티슈로 말끔히 닦고 나가려는데 '어라? 벽에도 점점이 얼룩이 있네.'

찾아보니 세면대는 물론 심지어 천장까지 어머나를 외치려고 할 때 문득 머리에 스친 것이 있었다. 며칠 전 동지였는데 어머니께서 절에 다녀오시며 팥죽을 얻어오셔서 뿌려놓고 가신 것이다. (라고 생각했으나...)


  친정엄마는 같은 아파트 길 건너에 사시며 일찍 출근하는 우리 부부를 위해 두 아이의 아침 등교를 봐주신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 어머니가 고이 개어 놓고 가신 편한 실내복이나 모르고 놓고 가신 스카프나 핸드폰은 일상이 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첫째 딸이다 보니 이제 우리 집이 이무롭기 때문일 것이다.(이무롭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가깝게 느껴져 꺼리는 느낌이 없이 편안하다는 전남방언 -편안하다는 말로는 95% 부족하다^^)

 

  천장까지 닦을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왔지만, 팥죽을 뿌려 액운을 막으려는 딸사랑이 지극한 어머니의 마음을 짐작하며 첫째 딸로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 집에 내년 액운을 이렇게 굿바이 하는 거라면 감사합니다. 꾸벅)

 아마 깔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분당 사는 둘째와 인스타를 하며 인테리어와 멋 내기에 힘쓰는 셋째 집이었다면 엄두를 내지 못할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쁘다 보니 2주 후에 어머니께 여쭤보니  안 그러셨다며 누가 욕실에 뿌리냐고 오히려 나무라신다. 작년에는 현관문에 살짝 묻히셨는데 올해는 그것도 안 했다면서...  이전 경험으로 인한 지레짐작이 이래서 무섭다. 죄송해요 오해해서...  관대한 첫째 딸 코스프레도 죄송하고요. 이것 또한 가족 간의 소통의 필요성을 깨달은 계기라 재밌는 에피소드로 부연 설명만 할 뿐 글 수정은 안 하기로 했다. 2주 후에 물어본 나도 대단하다... 남편과 대화해 보니 욕실 청소물품이나 염색약을 쓰다 튄 거 같단다. 어찌 색깔도 팥죽색과 이리 비슷할꼬)

 

그런데 나도 이제 지천명의 나이가 다가오면서 이런 절기 문화를 잇는 중간자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연히 들른 절에서 팥죽을 챙겨 오긴 했으나 그날 먹지 않고 베란다에 두었더니 친정엄마가 와서 "아이고, 그걸 아직 안 먹었어? 한 해 액운을 막는다는데 오늘이라도 꼭 먹어라"라고 하신다.  나는 전통문화의 징검다리로서 고분고분 네~라고 대답하고 그날 저녁 팥죽과 다른 반찬의 조합으로 퓨전식을 즐겼다.


  며칠 전 자주 이용하는 마켓*리에 들어가니 1, 2위가 팥죽과 새알이었다. 그래도 아직 동지에 팥죽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많구나라고 느꼈다. 하지만 몇십 년 후에는 동지라는 문화는 누가 이어갈까? 우리 어머니같이 미신이라도 좋으니 팥죽을 먹어야 한다는 의지가 없다면 동지 팥죽 문화는 검정고무신 속 이야기처럼 추억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20년쯤 후에 나는 우리 아들들에게 동지에 팥죽 먹었냐는 말을 할지 자신은 없지만 동지의 팥죽 문화가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팥죽할머니와 호랑이라는 이야기처럼 오래도록 꾸준히 스테디셀러 문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그러려면 동지 전에 팥죽을 직접 쑤진 못하더라도 어디서 사 먹을지 이번처럼 절에서 얻어올지 궁리라도 해야겠다.

   아니면 부족한 요리 실력이지만 팥죽을 쒀 팥죽 한 그릇 먹으러 오라고 아들들에게 또는 자매들에게 푸근하게 말할 나도 꿈꿔본다.


이번에 절에서 가져온 팥죽은 달다. 나는 내 입맛이 초등학생라 만족했지만, 친정엄마는 다니까 안 좋다고 하신다. 몇십 년 후에 팥죽은 또 어떻게 입맛에 맞게 변형될지는 모르겠다. (새알의 캐릭터화?) 그래도 동지의 의미는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밤이 가장 긴 날이 지나고 낮이 서서히 길어진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와 한 해가 지나고 새해가 슬슬 밝아온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날이다는 점 말이다.  

  오늘은 우리 어머니가 팥죽할머니와 호랑이의 할멈처럼 느껴진다. 액운이 어수룩한 호랑이처럼 어슬렁어슬렁 잘 물러갔으면 좋겠다.

*무안공항 희생자 분들을 깊이 애도하며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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