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격인 몽고반점에서는 작가는 크게 두 가지 문제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한 다름의 확장과 심화. 그리고 영혜에 대한 옹호 혹은 독자들에게 설득이 모두를 동반자, 조력자로서 감당해야 할 사람으로 형부를 지목했습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확장과 심화를 시도했을까요. "건강한 원시성". 이건 제가 순전히 지어낸 표현입니다. 한때 이 방면을 화두로 삼아 생각했던 적이 있기에. 건강한 우너시성을 설명하기엔 쉽지 않지만 나름 풀어보면 현대사회가 되면 될수록 상식, 교양, 도덕, 예의 등의 화장, 가면을 요구하고 이것은 진정으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원시성을 말살하려 한다는 관점입니다. 흔히 마초나 가부장적이 아닌 용기, 담대함 등의 결핍을 얘기하는 남성성이 죽었다는 말도 상통합니다. 소설에서 나타나는 가장 가까운 모델로 희랍인 조르바에 나오는 "조르바"정도를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원시성은 게걸스러운 유전자처럼 수렵 채취 시절부터 우리 유전자에 각인되어 아직 살아있는 것이어서 이것을 길들이여할 때 마찰과 반발이 발생하고 인간이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때 내린 결론의 갈래 중 하나이었습니다. 형부를 통해 영혜의 입장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는 방법은 주로 영혜의 표정이나 눈빛에 나타난 사실의 표현입니다. 말(대사)이 아니라 이것 또한 몸의 반응이라는 원시성, 상징이나 은유로 등장하는 나무, 꽃, 보통의 사람들은 커가면서 없어지는 몽고반점을 영혜는 간작하고 있다는 것은 근원, 본질, 원시성에 대한 작가의 은유적 설정은 아닐까요.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형부의 직업도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건강한 원시성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었을까.
3부 격이 "나무 불끛"은 애증이 교차하는 영혜와 가장 많은 시간을 공유했던 언니의 시선입니다 몽고반점에서 추상성이 구체성으로 내려왔다고 할까요. 독자에게 설득을 시키는 작업에서 이해를 구하는 모습으로 영혜를 거울로 삼았던 것입니다. 영혜의 언니, 지우 엄마, 속을 알 수 없는 예술가 남편의 아내, 폭력적 아버지를 둔 가정의 맏딸, 가정을 책임진 직업인 언니에게 지워진 이 모든 배역들을 바탕에 깔면서 자신의 생을 반추하고, 질문하고, 고민하고, 성찰합니다. 동생 영혜라는 거울로 말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때 이런 일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하며.
독백인지, 자책인지 모를 상태에서 언니는 영혜를 이해합니다. 불륜의 남편까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기억을 통해 그도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있었듯이 영혜는 좀 더 예민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미친것이 아니라. 이 경계에서 당신들은 과연 안녕하신가 묻는 것 같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꿈이라면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냐고 독자에게 마지막에 아프게 질문합니다.
채식주의자 한강의 문체는 탄탄하고 정교했습니다. 화려함은 없지만 영혜의 생을 기록하는 데는 적절한 문장이었습니다. 구성은 궁금증을 유발해 끌고 가는 힘이 있고 나무 불꽃 중간쯤 언니의 독백인지, 회한인지, 자책인지를 읽으면서 쭉 빨려 들어가 정신없이 책장을 넘길 정도로 흡입력도 대단했습니다. 이런 장점들과 더불어 다름에 대한 배척, 건강한 원시성의 제어 모두 인간에 억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근원적인 인간의 탐구가 서구인들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닐까 해서 읽기 전의 궁금증은 해도 되었습니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완전무결 완벽한 천국일지라도 예술가란 존재들은 불만을 토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공리를 따지지만 그들은 개별성을 중시하기에. 영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한강처럼. 하여 작가란 불온한 존재들이란 걸 새삼 확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