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도 없는 인생 Ep.9

4번째 회사는 다르겠지

by 설계도 없는 인생

이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채용 시장에 나왔을 때,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더 이상 ‘스펙 쌓기’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영어든, 자격증이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디에서 일하면 좋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면서도, 그보다 더 큰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어디에 속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일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또다시 채용 공고 사이트를 뒤지며 일할 만한 곳을 찾았고, 적당한 연봉에, 적당한 위치, 그리고 그나마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곳에 다시 취업하게 되었다. 이번엔 벤처기업 I사였다.

이 회사는 내가 채용되기 이전, 모회사에서 국가사업 지원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업부설연구소 형태의 회사였다.
모회사는 그래도 부산 조선업계에서 20년 정도의 업력을 가진, 나름대로 ‘기업’이라는 틀을 갖춘 곳이었다.
하지만 I사는 달랐다.

나는 ‘설계’ 업무를 한다는 설명을 듣고 지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채용되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나에게 원한 건 전혀 달랐다.

조선 업계에서는 선급사마다 보안 관련 가이드라인이 서로 다른데, 그 가이드라인들을 ‘통합’하는 자료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자료를 받자마자, 또다시 멘탈 무너졌다.
‘이게 설계인가?’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고, 그냥 하라고만 한다.
조선 업계는 처음이었고, 선급이라는 게 뭔지도 잘 몰랐다.
선급사마다 어떤 가이드라인이 있는지, 그걸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고 통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가이드도 전혀 없었다. 딱 한 마디, “알아서 잘해주세요.”

그래서 내가 처음 한 일은, 선급별로 가이드라인을 하나하나 수집하는 일이었다. 분류를 시도해 봤지만, 선급사 한 곳의 보안 가이드만 해도 300페이지가 넘었다.
그걸 일일이 읽고, 다른 선급사와 유사한 부분을 찾는 작업은 정말 쉽지 않았다. 게다가 모든 문서는 영어였다.

문제는, 이 영어 문장들이 조선 업계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를 알려주는 예시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하나하나 스스로 해석하고, 각 선급사별로 내용이 비슷한지 아닌지 비교하고 판단해야 했다. 그런데 그 경계가 참 모호했다.

그렇게 9개월이 지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보안 가이드라인을 통합하려고 취업한 게 아니었다.
이게 내 전공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새로운 회사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퇴사를 선택하기 전 합격을 받고 나가리라 마음먹었고 그 뜻대로 다섯 번째 회사는 네 번째 회사를 다니던 도중 합격 통보를 받았고 입사 기한을 내가 선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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