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산 폭격기의 실존적인 삶 고군분투기
금요일은 축구수업에 ‘일자산 폭격기’가 출격을 하는 날이다.
‘일자산 폭격기’는 축구를 할 때 내 열정을 추앙하며 남편이 지어준 별명이다.
사실 나는 열정 빼면 시체다.
스피드, 빠른 판단력, 넓은 시야.
나름 고성능 하드웨어를 타고난 편이다.
거기에 승부욕과 노력까지 더해져 스스로를 ‘성장의 아이콘’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재이자 연습벌레인 슬램덩크의 서태웅 같다고나 할까?
축구훈련 후, 팀을 나누어 미니 축구 게임을 하는데, 오늘은 감독님이 포지션을 정해주시기로 했다.
최근에 움직임이 남다른 최정예 선수가 축구 수업에 새로 들어왔는데, 오늘은 나와는 상대팀에 배정이 되었다. 감독님은 그 최정예 선수를 상대팀 미드필더로 꼽으셨다.
내 포지션을 배정하는 차례.
두구두구두구.
“노랑팀에서는 체력 좋으신 마리님이 미드필더에요!”
영화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의 애절한 눈빛으로 두 손을 모아 감독님을 바라보던 나를 감독님이 미드필더로 뽑으셨다. 그것도 최정예 선수와 같은 포지션으로!!! 역시!!!
하늘에서 부여한 짱짱한 하드웨어와 노오력으로 무장된 소프트웨어의 완벽한 결합, 나는 일자산 폭격기다.
사실 우리 축구클럽에는 운동능력이 우수한 사람들이 꽤 있다.
킥력이 우수하고 민첩한 호날다, 공수를 안 가리고 능력을 뽐내는 맵씨, 3명의 수비도 거뜬히 제치는 손홍민, 그리고 새로 영입된 축구 천재 옴바페.
열정 가득 부러운 실력의 소유자들이다.
오늘 경기에서도
‘한 번에 세 명을 제치네.’‘운동신경을 타고 난거에요.’‘침착성이 대단해요.’
내 귀에 그들 동료들의 재능을 칭찬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잠깐 동안 멈춰, 나는 폭격기 레이더에 감지된 타인의 재능을 메모리칩에 모두 복사해서 옮겨 담은 뒤 폭격기에 다는 상상을 한다.
최대한 무심한 척 하면서...
다시,
나는 빈 공간으로 공을 찔러 넣었다.
손홍민이 그 공을 받아 그대로 골문을 갈랐다. 동료들이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나도 웃으며 박수를 쳤다. 손홍민에게 엄지를 치켜 세웠다.
치켜든 엄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피노키오의 코처럼 멈출 줄 모르는 듯 내 어깨가 솟아올랐다.
‘와, 어시스트를 이렇게 잘하냐. 우리 팀이 이기겠는데? 내가 이 팀의 미드필더라서 그래.’
이후에도 폭격기는 비어있는 공간을 귀신같이 찾아내고 수비면 수비, 공격이면 공격에 전광석화처럼 날아들어 우리 팀을 도왔다.
최종 스코어는 4대 0.
승리.
내가 있는 팀은 십중팔구 이긴다. 그래, 나야 나 중원의 사령관, 일자산 폭격기지.
폭격기가 착륙했다.
일자산 폭격기는 경기에서 진 상대팀이 사 온 커피를 주유하며, 동료들의 수다 속에서 과열됐던 엔진을 식히고 있었다. 서로의 플레이를 칭찬하기도 하고, 유소년 축구팀에 들어간 아들의 고충을 공감하기도 하고, 육아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 때였다.
종종 공을 막는건지 사람을 막는건지 모를 플레이를 보여주는 일자산 전차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노랑팀에 호날다씨와 손홍민씨는 정말 지덕체를 갖췄어. 최고야~“
지덕체? 참 오랜만에 듣는 단어다. 근데, 덕과 체는 알겠는데, 지는 왜지? 어떻게 똑똑한 걸 알지? 의사라도 되나?
묘한 궁금증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나는 두 번째 최대한 무심한 척,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아이들 하교 시간이 다 되었다.
공을 따라 달리던 선수 모드를 끄고,
이제 하교하는 아이를 찾으러 달리는 엄마 모드를 켤 시간이었다.
동료들은 필드에 토해 낸 열정을 추스르며 삼삼오오 다음 주 수업을 기약했다.
나도 차례 차례 세상 사람 좋은 인상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 주에 뵈요.“
내 옆에 서 있던 전차 언니도 자리를 떠나는 호날다와 손홍민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다음 주에 봐요~“
그리고 난 후, 내게 고개를 돌려 속삭였다.
”근데 자기야, 저기 가는 저 호날다씨는 치과의사, 손홍민씨는 회계사래. 지덕체의 완벽한 조합이지?“
”우와.....정말요? 대단하네요...!!!!“
......!!!!!
”다음 주에 뵈요~!!!!!!!“
호다닥.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왜인지 점점 내 발걸음은 포르테에서 안단테로 안단테에서 아다지오로 느려져 갔다.
의사와 회계사라니…
그래서 축구를 잘했구나.
…라고, 내 마음이 멋대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방금 전까지 중원의 사령관이던 내가, 갑자기 벤치의 후보 선수 신세가 되어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몸에 이미 스며든 땀을 샤워기로 닦아냈다.
오잉, 그리고나서 바라본 거울 속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가 서 있었다.
필드에서 부린 자부심인지 우월감인지 모를 전능함의 옷을 입고,
사회적 지위, 직업의 귀천이라는 장식을 두른 나르시스가 그 곳에 있었다.
분명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데 말이다.
불현 듯 그의 옷과 장식을 던져버리고 다시 깨끗하게 샤워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내 안에서 누군가 계속 말하고 있었다.
남보다 잘해야만 가치가 있다고.
나는 그 말을 믿고 축구장 모양의 감옥에 다녀온 것이었다.
사회적 지위 앞에서 축구의 열정마저 계급을 매기고, 비교라는 창살을 세운 감옥.
아, 내가 다녀온 곳이 축구장이 아니라 감옥이었구나.
답답했던 가슴이 이내 먹먹해졌다.
그리고 나서도 한참이나 거울을 들여다봤다.
그래, 오늘은 이제 그만.
이제 나르시스를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 재워야지.
그리고 난 후, 나는 폭격기가 세워져 있는 격납고로 향했다.
그리고는 폭격기에 손을 가만히 대고 읊조렸다.
누구보다 자신인 사람으로 살아.
사회적 지위, 타인의 박수, 직업의 귀천... 이런 껍데기를 다 벗겨내고도 남는 뜨거운 너만의 숨소리로 축구장을 달려보아.
중원의 사령관은 이내 훈훈한 공기가 채워진 격납고를 나왔다. 씨익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언니~ 나도 실은 사짜야.
필드의 연금술사.
내 인생의 연금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