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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Aug 11. 2021

편지를 쓰기 전에

프롤로그

오래 전에 저는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AROUND 라는 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잡지의 에디터인데, 블로그를 잘 보고 있으며, 블로그에 쓴 것과 비슷한 내용으로 책과 영화에 대한 칼럼을 써줄 수 있느냐는 메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춥고 낡은 집에서 아이 둘을 키우며 반쯤 실성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블로그에 끊이지 않고 뭔가를 쓰고는 있었지만 이웃이 200명도 채 되지 않는, 그냥 제 친구들이나 들어와서 가끔 댓글을 달아주는 그런 블로그였습니다. 


AROUND는 저에게 특별한 기대를 하는 것 같지 않았고, 한 달 써보고 난 후 계속 할지를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원고료는 말도 안 되게 박했지만, 아무것도 아닌 저라는 사람의 글을 잡지에 실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나요. 쌩유 베리 머치. 그렇게 생각하고 덥썩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8년이 지났습니다. 8년 동안 단 한 번도, 다음 달에도 당연히 청탁이 올 거야, 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 달의 주제라든가, 다음 달의 일정 같은 것은 계획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요즘도 넋을 놓고 지내다가 담당 에디터에게 연락이 오면 그제야 부랴부랴 책을 찾고 영화를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안에 잡지에 실리지 않은 수많은 책과 영화들을 집어던진 거대한 쓰레기통 비슷한 것이 생겨버렸습니다. 쓰레기통이라고 하면 뭣하지만, 어쨌든 함부로 소각해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쓰레기통이지요. 쓰레기통에 담긴 것들은 가끔씩 꺼내서 먼지도 털어주고 햇볕에 널어두어야 썩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은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는 그에 대한 답례의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야기는 어딘가로 날아가버리거나 그대로 썩어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라는 사람의 밑거름이 됩니다. 거름으로 비옥해진 토양에 발을 단단히 디디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태풍에도 뿌리가 뽑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럭저럭 흔들흔들하면서도 대충대충 버텨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읽었던 책들에 대해서(가끔은 영화에 대해서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즐겁게 수다를 떨고 싶었습니다. 그런 것은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 더 재미있게 하고 싶다는 마음에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왜, 그런 마음 있지 않나요. 좋은 책이나 재미있는 책이나 이해할 수 없는 책이나 싫은 책이나 시시한 책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이 책 읽어보셨어요?" 하고 말을 걸어보고 싶은 그런 마음 말이에요. 그 책을 사랑하는 내 마음이, 싫어하는 내 마음이 어떤 것인지 누군가와 수다를 떨면서 확인해 보고 싶은 그런 마음 말입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수다를 떨 수 있을 상대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비로소 그런 분을 만난 것 같습니다. 김설 작가님의 책을 읽고 나서 곧장 그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 분이다! 이 분이라면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을 것 같아.' 이 분에게 내가 읽은 책 이야기를 칭얼대며 들려주고 싶었고, 또 이 분에게서 책 이야기를 끝도 없이 듣고 싶었습니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해서 좋은 책이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고 이상히 여기고 이해해보고 싶은 책들에 대한 솔직하고 담백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출간이나 게재를 목적으로 한 글쓰기가 아니라, 순수한 충동에서 비롯한 글쓰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김설 작가님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오케이를 해주셨어요. 


김설 작가님의 책 <사생활들>을 읽고 나서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 단어는 '고상한 기분 전환' 입니다. 제 인생은 딱히 고상하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아이고 죽겠다, 이러다 죽지, 아니 정말 죽는 거 아니야? 하고 괴로워하며 개똥밭을 구르는 것이 제 인생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저에게는 은신처가, 고상한 기분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결국은 중년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이 편지 교환이 고상한 기분 전환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이 공개 편지를 읽는 여러분에게도 잠시나마 그런 시간이 될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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