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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Aug 13. 2021

첫 번째 편지

프롤로그







며칠 전 내 인생에 뜻밖의 일이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예상치 않은 그런 일들은 대개 내 삶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합니다. 처음에는 꿈인지 생시인지 얼떨떨했지만, 지금은 애초에 내 삶이 그렇게 흘러가기로 정해진 것처럼 짐짓 태연한 척하고 있습니다.

함께 글을 쓰자는 한수희 작가의 메일에 어쩌자고 빛의 속도로 답장을 했을까. 조금 전 메일함을 열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까 20분 만에 하겠다는 답장을 보낸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광속으로 답을 한 이유는 이거였습니다.  


   

“설님! 서로가 아는, 서로가 좋아하거나 또는 싫어하거나, 이해할 수 없거나 아무튼 그런 책들에 대해서 편지를 쓰는 것이에요. 정말로 자유롭게 말이에요.”라는 문장.  


    

한수희 작가님과 함께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저지르고 볼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서서히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타인과의 관계가 어려운 사람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나를 쾌활한 사람인 줄 알지만 만남이 두 번째가 되면 처음과는 다른 어색함을 느끼는 편입니다. 속으로는 좀 더 명랑하고 유쾌한 나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꺼내어 주변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고 싶지만, 이상하게 분위기는 점점 썰렁해집니다. 누군가와 마주 보고 앉으면 짧은 침묵의 순간이 왜 그렇게 자주 찾아오는지, 그런 시간이 억겁으로 느껴질 때쯤이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그야말로 죽을 맛이 됩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식사를 해야 할 상황은 되도록 만들지 않고 (수희 님과의 첫 만남에서도 커피만 마셨죠) 두 번째 만남에서 피자를 안주로 맥주를 마셨는데 그건 내 인생에서 대박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나이에도 밖에서 자면 뜬눈으로 밤을 보냅니다. 보기엔 안 그래 보이는데 엄청 예민하고 긴장도가 높아서 철인 28호의 어깨를 가졌습니다. 말도 어버버. 부자연스러운 나의 태도가 상대에게 전염이 되고 그들이 슬슬 멀어지는 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점점 작아지고 작아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의 모든 책을 찾아 읽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책, 재밌는 책, 웃긴 책, 더러운 이야기가 담긴 책, 욕이 나오는 책, 쓰레기통으로 던지고 싶은 책,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사람들이 믿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나는 책을 읽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사라지고 하루가 정말 행복해졌거든요. 다섯 권쯤 쌓아놓고 아니, 많을수록 좋아요. 털털 털털 오래된 선풍기가 내는 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멀어지면 나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양지가 바른 곳에 다다르면 가만히 햇빛을 안아 몸을 데웠고 음습한 곳 때로는 불행의 그림자가 짙은 곳에 도착하고는 몸서리를 치며 빠져나오곤 하죠. 책은 나를 홀립니다. 책을 읽을 때만이 한가로움과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는 이유를 여전히 모르겠어요.      


요즘은 그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아주 천천히 고요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할 때가 있는데 바로 책 수다를 떨고 싶을 때입니다.  

   

이 책 읽어보셨어요?

이 책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아우, 진짜 뭐 이런 거지 같은 책이 다 있어요?  






    

나는 아무거나 잘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책을 읽으면 할 말이 많아집니다. 책 취향도 독특한지 남들이 좋다는 책이 재미가 없고 다른 사람이 집어던진 책에 호기심을 느껴요. 이런 내가 책 편지를 교환하는 것을 운명이라고 여기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나의 날것과 수희 님의 날것의 교환은 단순히 개인적인 읽고 쓰기의 영역을 넘어 다른 새로운 발견과 감동을 줄 것이라는 거창한 말은 삼가겠습니다. 다행스러운 건 우리가 서둘러 가까워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느긋한 편지 교환이라는 점입니다.     


오늘도 저는 빳빳한 양장본의 책을 펼쳤습니다. 그럼 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날 다시 오겠습니다.     





2021.8.13 김설


     



ps: 결국 책도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는 이상한 말을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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