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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Aug 17. 2021

빛과 어둠에 대해

임혜지, <고등어를 금하노라>

설님께 


안녕하세요, 설님. 설님께 보내는 첫 책 편지에는 어떤 책을 골라야 할까, 고민을 좀 해봤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고민 말고도 해야 할 고민이 천지입니다. 회사 일도 고민해야 하고, 집안일도 고민해야 합니다.(회사 홈페이지 스킨을 뭘로 바꾸나, 더러운 사무실을 어떻게 정리하나, 베란다 페인트는 언제 칠하나…….) 게다가 제 자신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하고요.(왜 살이 안 빠지나,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이거 암 아니야?) 제 자식들 고민도 해야 합니다.(저 놈 수학 저렇게는 안 되는데 어떻게 하나, 친구 하나도 없는 저 이상한 놈 나중에 왕따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나.) 


심지어 지역사회와 대한민국의 미래, 지구온난화까지도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고민과 걱정이 많다 보니 어느 순간 제 얼굴은 평온한 기분으로 TV를 보거나 인스타그램의 검색 페이지를 1시간째 아무 생각 없이 쓸어 넘기고 있어도 아이들이 “엄마 얼굴이 왜 그래?” 라고 묻는 그런 얼굴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아, 인생.


그래서 저는 고민을 안 하기로 했습니다. 제게 더 이상의 고민은 사치입니다. 어차피 이 편지의 목적도 ‘마구 써보자’ 이므로, 고민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고민은 하지 않고 그냥 딱 떠오르는 책에 대해서 제멋대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제 특기는요, 책 얘기하는 척하면서 내 얘기 하기, 거든요. 어차피 무슨 책이든 상관 없습니다. 


설님, 이 책 읽어보셨어요? 제가 오늘 들고 온 책은 임혜지의 <고등어를 금하노라>입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제 오래된 책에도 쓴 적이 있지요. 저는 이 책을 한때, 정말 사랑했습니다. 마음이 복잡하고 이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무지 감조차 안 잡힐 때 저는 이 책을 꺼내 읽었어요. 읽다 보면 웃으면서 울다가 또 웃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으며, 책장을 덮을 때면 제 목 뒷덜미와 팔과 다리를 따라 씩씩한 기운이 용암처럼 콸콸대며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지금 이 책을 다시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저는 이제 이 책을 읽던 30대가 아닙니다. 30대에 저는 22개월 차이가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반실성 상태였어요. 남편은 어딘가에 자꾸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듯 실직을 반복했고,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가계에는 자꾸만 구멍이 났으며, 집은 견딜 수 없이 추웠고, 1년에 한번, 아니 2년에 한번조차 여행을 갈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요. 그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쳤던 일들은 지금껏 제가 썼던 책들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끔, 아니 자주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터널을 나는 어떻게 빠져나왔을까?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내가 잘나서 그런 걸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무시무시하던 시절에도 저에게는 ‘빛’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빛’이 좋은 운과 좋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빛’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면요, 우리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 주려고 최선을 다했던 부모님에게서 온 것이기도 하고, 또 이런 책들에서 온 것이기도 해요. 그렇습니다. 이 책은 제게 부모님과 같아요. 부모님은 한없이 고맙고 사랑하고 또 존경하는 사람들이지만, 나이가 들어 바라보면 뭐라고 해야 하나요, 신이 아니라 좀 더 인간에 가까워지지요. 가끔은 왜 저러나 싶고, 여전히 인간적인 결점을 극복하지 못했으며, 지금 그들의 삶을 볼 때면 함께 여행하던 기차에서 내려 작은 간이역 벤치에 앉아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합니다. 저는 여전히 기차에 타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말이에요. 


잠깐 딴곳으로 빠져 볼게요.(역시 제 특기입니다.) 가끔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인스타그램의 주인이 자기 사진을, 대개 근사한 자기 사진을 올렸을 때 말이에요. 저는 ‘아 멋지다’ ‘예쁘다’ 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제가 같은 일을 하려고 하면, 일단은 남이 찍어준 제 사진이 없고요(남편은 사진을 1년에 두 번 찍을까 말까 한 사람입니다. 제 친구들도 사진을 전혀 안 찍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내 셀카를 찍어 올릴 수도 없고요(셀카를 찍을 때마다 느껴지는 좌절감...), 운 좋게 누가 찍어준 내 사진을 올리려고 하면 민망함이 뒷덜미를 잡아채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냥 내 자랑이 아닌가, 싶은 거지요. 


아마도 인스타그램에 자기 사진을 자주 올리는 사람은 그러기 위해 누구한테 자기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을 거고, 아니면 누군가가 찍은 자기 사진을 내게 보내달라고 했을 거고, 그 중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골라서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사진을 고르고 그에 맞는 글을 썼을 거예요. 그런데 그 과정 중 어느 하나도 저에게는 쉽게 보이지 않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르네요. 네, 맞아요. 저는 좀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아요. 


<고등어를 금하노라>를 읽으면서 저는 그런 것과 조금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혜지 작가는 역시 자기 인생의 좋은 면만을 편집해 보여준 것은 아닌가. 아니면 자기 인생을 좋게만 바라보려 노력하는 건 아닌가. 아니면 스스로의 좋은 점만을 애써 내세우려는 건 아닌가. 이 사람은 자의식이 대단하며, 지기 싫어하는 고집으로 똘똘 뭉친 사람은 아닌가. 제가 뒤늦게 그렇게 의심하는 이유는 아마도, 저 역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일 거예요.  


물론 책 속에서 임혜지 작가는 여러 번, 책 속의 자신과 실제의 자신은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일이 애호박 자르듯(세상에서 가장 자르기 쉬운 채소는 이제 ‘무’가 아니라 ‘애호박’ 또는 ‘주키니 호박’으로 바뀔 때도 되었습니다) 깔끔하게 진행된 것도 아니라는 고백도 중간 중간 합니다. 


그럼에도, 나라면 이렇게 쓸 수 있을까? 내 아이들이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고 문제도 있었지만, 이렇게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자립심도 강하고 철부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잘 자란 그런 아이들이라고 쓸 수 있을까?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속물적이고 이기적으로 굴 때,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그들의 콧대를 꺾어줄 수 있을까? 그런 일을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저는 못할 것 같아요. 


어쩌면 저는 음흉한 사람인지도 몰라요. 저 역시 속으로는 나 잘난 맛에 삽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웃고, 오만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결국은 내가 옳다는 답을 얻고 싶어 합니다. 지고 싶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자의식의 소유자에, 자뻑의 끝판왕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남들에게 여과 없이 드러낼 정도로 뻔뻔하지는 못할 뿐이지요. 아마 외모에 자신감이 엄청났다면 인스타그램에 제 사진도 질릴 정도로 올렸을 겁니다. 


이 책은, <고등어를 금하노라>는 여전히 저에게 좋은 책입니다. 고마운 책이기도 해요. 이 책에 쓰인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틀린 말이 없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의 씩씩함과 용기와 ‘빛’ 같은 것이 여전히 저에게도 스며드는 느낌이 듭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 ‘빛’ 같은 것에 질려버릴 것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창문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거의 모든 벽에 창이 있어요. 처음 사무실을 얻을 때, 밝은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며 좋아했었습니다만, 실제로 여기서 일을 해보니 빛 때문에 환장할 지경입니다. 봄과 가을에는 역시 좋은데요, 여름에는 모든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으면 타죽어 버릴 거예요. 겨울에는 겨울 대로 부실한 창 너머에서 몰아치는 찬 바람 때문에 비닐로 창을 다 막아야 할 지경이고요. 


제가 하는 일 중에는 사무실에서 사진을 찍는 일도 있어요. 밝으니까 사진도 잘 찍히겠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찍은 사진은 하나같이 밋밋하고 어쩐지 재미없는 사진이 되어버리더군요. 왜 그럴까, 고민하다가 어두운 예전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보면서 알았습니다. 빛은 적당한 어둠이 있을 때 부드러워진다는 것을요. 어둠은 빛 덕분에 품위 있게 깊어진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리고, 저는 앞으로 빛과 어둠에 대해 무엇보다 많이 생각할 작정입니다. 



- 수희 드림 




추신. 하지만 저는 요즘도 임혜지 작가님의 근황을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새 책을 내주신다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읽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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