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당구장, 내 두 번째 인생

by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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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의 회사 생활은 익숙해질 만한데, 아무리 해도 견디기 어렵다.
일은 익숙해져도 사람과의 관계는 갈수록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니 내 몸을 상해가면서까지 버텨야 할 이유는 흐릿해졌다.
중년의 문턱에서 나는 지쳐 있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 내 가족에게 미안했다.


한때는 트레이딩에 빠져 살았다.
처음엔 소소하게 주식을 시작했고, 그게 선물로, 나중엔 암호화폐까지 손을 뻗었다.
차트를 보고 있으면 뭔가 통제할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오르고 내리는 숫자 속에서 내 감정도 출렁였다.
‘이번엔 방향이 확실해’, ‘이번엔 다를 거야’, '나는 이길 수 있어'

그럴듯한 계획과 전략으로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처음엔 몇 번의 수익이 나를 들뜨게 했고, 그게 독이 되었다.
몰빵, 레버리지, 손절 실패.
밤늦게까지 잠을 못 자며 스마트 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계좌의 돈뿐 아니라 내 건강까지 잃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놓지 않았던 게 하나 있다면, 당구였다.
주말마다 당구동호회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고,
회사 끝나고 짬이 나면 알바로 당구장 일도 도왔다.

당구대 닦고, 공 정리하고, 잡일을 도우며 나는 묘하게 편안해졌다.
돈보다, 그 단순한 일을 통해 내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꼈다.
무언가를 복잡하게 따지지 않아도 되는 공간,

성공이나 성과 같은 단어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괜찮다’는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게 나중에 이 당구장을 인수하게 되는 아주 조용한 시작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당구장이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망가진 간판, 삐걱이는 출입문, 낡은 당구대.
다 알고 있는 공간인데, 그 풍경이 왠지 마음에 남았다.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다.
“이거 내가 인수하면 어떨까?”
그 말이 시작이었다.

주변은 다 말렸다.
이 나이에, 이 타이밍에, 무슨 당구장이냐고.
나도 무모한 짓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간절했던 것 같다.
뭐라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인수하고 보니 더 엉망이었다.
먼지와 곰팡이, 고장 난 조명, 빛바랜 벽지. 누렇게 변색된 블라인드
말 그대로 방치된 공간이었다.
나는 말없이 고무장갑을 끼고 청소부터 시작했다.
손님이 없으므로 하루 종일 천장, 창틀, 당구대 아래, 세면대 배수구까지.

묵은 때가 벗겨질수록 내 머리도 맑아졌다.
큐대 하나하나 닦을 때마다 마음이 고요해졌다.
이 공간을 정리하며 나는 나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후부터 당구장은 내 일상의 중심이 됐다.

처음엔 손님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나는 조급해지지 않았다.

그저 꾸준히, 당구장을 청소하고 준비하고 공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당구대 정비를 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오전엔 오전반 회원들이 문을 열고 나는 점심 먹고 나와서 정리하고 있으면 동호회 친구들이 모인다.
요즘은 자리가 없어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손님이 몰린다.

동네에서는 잘 된다는 소문이 났고,
누군가는 나를 ‘경영의 신’이라고 농담처럼 부르기도 한다.


누군가는 커피 한 잔을 슬며시 놓고 가고,
누군가는 손님이 나간 자리를 먼저 가 조용히 정리한다.

많은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오간다.

손님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 같이 하는 협력의 공간이다.
이 작은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관계는 대체로 따뜻하다.


수입이 대단한 건 아니다. 워낙 당구장 객단가가 낮다 보니.
하지만 분명한 건, 이곳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공간이 또 누군가에게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여백 같은 곳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도.

복잡하던 내 마음은 단순해졌고,
잃어버렸던 나다움을 다시 찾고 있다.


어깨에 짊어졌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이곳에서 숨을 고른다.

이 당구장은 내 두 번째 인생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곳이 누군가에게도 숨을 다시 고를 수 있는 공간이 되어줄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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