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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연 Sep 12. 2024

고3 딸과 수능 전날 셀프도배

엄마가 응원해

2022년 11월 16일 (2023 대입 수능 전날)

"0아, 그 끝을 잘 당겨야지"
"엄마, 거기, 거기 왼쪽 붙으면 안 돼"
"도배지 찢어질라. 살살 문질러"
"0이 네가 한다며? 왜 내가 이렇게 힘들지?"
"내가 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참지 못하고 하는 거잖아."
"야, 너 내일 수능인데 지금 꼭 이걸 해야 하는 거야?"
"에이  수능 뭐 그까짓 것 평소 실력대로 보면 되는 거야?"


수능을 하루 앞둔 딸과 나는 거실 벽을 셀프 도배하느라 정신이 없다. 남들이 보면 우리 두 모녀의 하는 짓이 당최 이해가 가지 않을 듯싶지만 우리는 '까르르. 하하 '웃으며 신나게 셀프도배를 하고 있다.


2022년 3월 오전

가족 모두 출근, 등교시켜 놓고 혼자 여유를 즐기며 커피 한잔하고 있는 오전시간에 학교에 간 딸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 엄마, 나 지금 담임 선생님과 상담했어. 지금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 대충 나왔는데 가고 싶은 곳도 없고 하고 싶은 공부도 없어.  억지로 성적 맞춰서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육사 시험 볼 성적 아니면 나 대학 안 가고 취업하고 싶어. 대학 등록금 아까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혼자 하고 싶은 말만 계속 늘어놓는다. 이건 엄마의 의견을 듣고자 전화한 게 아니다. 자기의 생각을 나에게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무슨 말하고 싶은지 알겠어. 우선 선생님과 한 상담 내용 잘 정리해서 집에 와. 저녁에 아빠, 오빠 있을 때같이 이야기해 보자"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면 더 확고하게 고집을 부릴 아이라는 걸 안다. 우선 무슨 생각인지 들어보고 그 생각이 틀렸다면 하나하나 이유를 들어 설득해야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을 시작할 때도, 그리고 중2 때 그 운동을 그만둘 때도, 고등학교 원서를 쓸 때도 역시 그랬다. 고등학교 입학 후 '코로나'로 인해 학교생활에 재미를 못 느낀 아이는 학교 가기를 싫어했다. 조금씩 흔들리던 아이는 고2 때 그 방황이 절정을 이뤘고 따라서 떨어지는 성적은 당연한 결과였다. 아침마다 학교에 보내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고, 교문 앞까지 태워주고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날이 많았다. 내가 지는 날도 많았다. 다행인 건 학교에 가지 않아도 집구석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


모든 걸 잘하는 아이.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 하지만 오기와 끈기는 부족한 아이. 그런 이 아이가 내 딸이다.



그날 저녁, 남편은 아이를 불러 아이의 생각을 물었다.

내게서 대충 이야기를 들었고, 이제 아이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아빠, 나 육사 갈 성적 안된대요. 그럼 아무 데나 가서 등록금 버리면서 시간 낭비 하기 싫어 내가 하고 싶은 거 찾아서 해 볼게"
"뭐가 하고 싶은데?"
"00 준비해 보고 싶어, 어려울 줄 아는데 그래도 한번 해 보고 싶어"
"그래? 해보고 싶어? 그럼, 약속 하나 해. 앞으로 남은 고3 생활 결석 없이 학교 잘 다녀. 엄마가 데려다주는 거 그만하고 네가 버스 타고 다니고, 앞으로 00 보기 전에 뭐부터 준비해야 하는지 돈은 얼마나 필요한지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다 알아보고 보고서로 만들어서 엄마, 아빠한테 설명해 일주일 시간 줄게"
"학교 선생님들께는 네가 가서 잘 말씀드려. 학교 공부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남편의 이런 모습 낯설다. 이날은 장난기가 없다.

다음날부터 아이는 정말 깨우지 않아도 일어나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왜, 그런 허락을 하셨어요. 진짜 허락하신 게 맞아요? 0이 서울 안에 있는 대학 충분히 갈 수 있어요. 어머니 0이 나중에 후회할 거예요"
"그럴 거라는 거 알아요. 그래도 해보고 싶은 거 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대학은 나중에도 갈 수 있잖아요"


확신 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이를 믿어줘야 하는 건지, 아님 말려야 하는 건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를 위한다는 나의 행동이 올바른 건지 아님 난 아이의 의견을 잘 수용하는 쿨한 부모인 척을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 이도저도 아니면 난 아이의 미래에 관심이 없는 부모인가.  정답은 모르지만 아이가 원하는 게 뭔지는 지금 확실하다. 대입을 위한 공부는 하지 않겠다는 것. 대학이야  가고 싶을 때 가도 되는 것이다. 그래 마지막 학창 시절을 재미있고 성실하게 보내겠다는 약속만 지켜준다면 나도 아이를 응원해 주기로 하였다. 아이는 약속을 잘 지켜내고 있었다. 공부에서 손을 놓고 있었지만 바닥은 찍지 않았고,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말도 더 이상 없었다. 마지막 학교 생활을 후회 없이 즐기고 있었다. 가끔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아이에게 물었다


"대학 진짜 안 갈 거야?  대학 새내기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이 있어. 그건 20살 그때 한 번뿐이다.  너 그땐 햇살도 공기도 모두 다르게 느껴져"
"엄마. 그만해 난 지금의 햇살과 공기도 좋아"


2024년 현재


아이는 지금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 품을 떠나 힘들지만 무던히 노력 중이다. 

                         엄마가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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