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연대기 39
한동안의 비상대기가 끝나고 나서야 라 군은 비로소 자취방에 복귀할 수 있었다.
군인이 본분인 이상 라 군을 포함한 부대에는 늘 ‘주적’이 있었고,
그 주적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다.
그들이 표현하는 존재감은 어딘지도 모를 머나먼 태평양을 향해 로켓을 쏘아 올린다거나,
때로는 아군 측 초소 근방으로 기관총을 쏘아댄다거나,
그도 아니면 방송을 통해 거나한 욕질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었다.
이번에 그들이 꺼낸 카드는 좀 더 심각해서 전방지역에 대포들을 대거 배치하고,
이따금 산발적으로 피아간에 총격이 있기도 해서 부대원들은 맘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라 군은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늘 상급부대에서는 긴급전문으로 경계 강화 지시가 내려오곤 했다.
그러면 부대 내에서는 긴장감 속에서 뭔가 좀 더 피곤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기다림과 퇴근을 막는 대기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라 군이 군대에 들어온 이후, 어쩌면 훨씬 그 이전부터 늘 경계 강화 전문은 상급부대에서 내려오곤 했었지만, 시간이 흘러 경계 완화 전문이 온 적은 결코 없었다.
공식적인 완화 지시 같은 건 아예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어째 흐지부지 이전과 비슷한 정도의 상태로 느슨해지는 거였다.
그것을 두고 상급부대도 뭐라 한 적도 없는 데다,
라 군이 보기에 대체 어떻게 타이밍을 맞춰 슬금슬금 완화할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병촌 구석의 낡은 자취방이었지만 버글대는 병사들의 시선과 냄새가 없는 방으로 돌아온 라 군은 잠시 누워서 근, 이 주 만에 맛보는 자유를 누렸다.
저녁도 먹지 않아 시장했지만,
이 주 동안 영애를 한 번도 보지 못한 터라 라 군은 군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다시 군화에 발을 넣었다.
평소라면 평일 저녁이면 사람을 찾기 어려운 병촌 상가지만,
오랫동안 경계 강화가 있던 탓인지 오늘은 유독 여기저기 음식점과 술집이 제법 왁자한 분위기였다.
두 주일 동안 갇혀 지내던 간부들이 모처럼 퇴근과 영외외출로 인해 그간 못했던 약간의 자유를 누리는 모양이었다.
중국집과 당구장 게임장을 지나 익숙한 다방에 들어선 라 군은 갸우뚱했다.
다소 북적이던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다방은 손님 한 명 없이 한산했으니까.
하긴.이라고 라 군은 생각했다.
이 주 동안 영내에 강제로 대기하던 사람들이 모처럼 자유가 주어졌는데 굳이 다방을 올 일은 아니니까.
어느 정도 저녁 시간이 다 지난 이후에야 얼큰한 상태로 다방에 입가심이라도 하러 들어올지는 모르지만.
다방 내부를 훑어보는 라 군의 시선에 카운터 너머에 앉아서 혼자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는 마담이 보였다.
사십 대 조금 넘었을까.
병촌의 술집이나 다방에 있는 여성들은 도무지 나이를 알 수 없었다.
거의 가면처럼 두껍게 발린 화장으로 인해 라 군과 같이 아직 이십 대에 불과한 청년들이 볼 때는 그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라 군이 예상치 못한 다방 풍경에 쭈뼛대며 의자에 앉곤 두리번거리며 영애를 찾았다.
아직은 이른 시간인데 벌써 어디 술집에서 티켓이라도 불렀나 싶어 조금 풀이 죽은 라 군의 맞은편 의자에 누가 털썩 앉았다.
마담이었다.
이곳 다방을 제법 오갔었지만, 마담이 앉아서 말을 거는 건 처음이었다.
- 라 하사님. 저기 윗동네 235부대 계시지?
반말도 존대도 아닌 말을 쓰는 주민들에는 익숙한 라 군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부대의 초급간부들이란 사실 막냇동생 정도나 될까 싶은 ‘애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또 한편 그 ‘애들’이 나름 이 지역의 상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모르는 장사치들은 없었다.
그런 연유로 나이가 좀 있는 상가의 상인들은 늘 간부들에게 반 존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반말도 아닌 모호한 어투를 쓰곤 했다.
게다가 라 군이 마담과 수인사를 나눈 적은 따로 기억에 없지만,
이미 군복을 입고 있는 이상 마담은 한눈에 척하니 그가 있는 부대뿐 아니라 이름과 계급, 병과까지 다 알아낼 정도의 짬밥은 되었을 테니까.
- 네 맞습니다. 경계 강화 때문에 영내에서 오래 있던 바람에……. 그런데 혹시 영애, 아니 영자 씨 어디 티켓 나갔습니까?
군용 말투가 역력한 라 군의 말에 마담은 흥, 하니 바로 콧방귀를 뀐다..
그러더니 게슴츠레한 눈을 더 게슴츠레 뜨곤 라 군의 생각이라도 살피려는 듯 라 군을 위아래로 훑었다.
- 영자? 그러고 보니 하사님 영자랑 동창이라고 하던 거 같던데, 그런데 몰랐어요? 진짜?
라 군은 뭔가 그 순간 경계 강화 소집령이 다시 내린 것 같이 명치가 갑갑해 왔다.
뭔가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를 불안감.
그리고 가슴속 저 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공포.
- 뭘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라 군의 심각해진 표정을 읽었는지 마담은 다시 흥, 하니 코웃음을 친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금 라 군을 위아래도 훑어보며 뭔가를 혼자 중얼거렸다.
- 뭐 경계태세였으면 몰랐을 수도 있지. 영자 그년, 빚도 안 갚고 어디로 튀었다니까요?
- 네?
라 군은 갑자기 뜨거운 라면을 채 불지도 못하고 꿀꺽 입안에 넣은 듯 목울대가 화끈한 것이 난감해졌다.
차마 뱉을 수도 없고 이대로 삼켜버리면 식도를 다 데일 것 같은 그 황당함을.
- 빚... 을 안 갚아요?
- 그러게 말이야. 나쁜 년. 혹시 라 하사님이 동창이면 그년 사는 동네도 알겠네? 그쵸?
마담의 눈이 번뜩이는 게 꼭 매복작전 때 어둠 속에서 번들대던 늙은 병장들 눈빛이라고 생각을 한 라 군은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 모르죠. 제가 고등학교를 타 지역으로 가서 기숙사 생활을 했거든요.
물론 자신이 그렇게 반 억지로 장학수혜를 받는 사이에 자신이 집안은 더더 풍비박산이 나서 어머니도 형도 뿔뿔이 흩어져 남의 집 살이를 하고 있어서, 방학 때도 돌아갈 집이 없어 학교 기숙사에 남아 아르바이트로 때운 이야기까진 안 했다.
영애네가 아직도 그 시장판 집에 사는지도 모른다.
영애 말대로라면 집안이 거덜 났다고 하니 아마 그곳에 온전히 살진 않겠지.
아니, 어쩌면 그 말마저도 영애의 거짓말인 걸까.
- 에휴. 그럼 그렇지. 이건 뭐 그짓말 아닌 게 있어야지. 이 년을 어떻게 잡지? 세상에 내 몇 개 안 되는 금목걸이에 팔찌에 반지에, 다 털어갔다니까? 도둑년.
라 군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안 느껴졌다.
마치 처음으로 북한의 GP와 교전을 치르고 난 이후의 먹먹함이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