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라면 연대기 45
라 군이 남은 외박시간을 어떻게 보냈고, 또 어떻게 부대로 복귀했는지는 라 군 자신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과정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생각에 집중했었던 것 같다.
집중이라기보다는 복잡해진 마음을 스스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는 게 맞겠지만.
우연히 이 머나먼 병촌에서 어린 시절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애를 만났다.
그리곤 뭔가에 홀린 듯 자신이 동원할 수 있던, 실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도움을 주게 된 것은 순수한 호의였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홀연히 행방을 감추고 난 후에 심한 배신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배신감의 연원이 그저 돈까지 갖다 준 자신에게조차 아무 말 없이 사라져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보인 순수한 호의에 대한 무시를 당한 것에 대한 마음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호의를 통해 뭔가 영애에게 더 기대했던 마음이 저도 모르게 숨어있어서였을지는 몰랐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또 다른 우연으로 그 넓디넓은 서울에서 다시 그녀를 마주친 것.
그때 들었던 원망과 배신감 같은 것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반박 불가능한 떳떳함과 속마음인지 뭔지도 알 수 없는 유혹.
그걸 유혹이라고 할 수나 있을까.
유혹이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에게 던진 시험 같은 건 아니었을까.
자신의 호의에 대해 네 속뜻은 뭐냐라는 식의 시험.
라 군도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곱씹어 생각해 봐도 자신의 내면 깊숙한 속마음에서 영애를 향한 미묘한 바람이 있어서 그녀의 처지에 동조하고 손길을 내밀었던 것인지,
그게 아니면 영애 말대로 구원자 증후군 같은 성격이 있어서 그것이 영애가 아닌 다른 누구이었다 해도 구원자를 자처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신촌에서의 그날,
영애가 유혹도 뭣도 아닌 손짓을 했었을 때 자신의 가슴 한구석이 몹시도 동요되었었다는 사실.
그리고 정작 동요는 되었지만, 그 순간 그 장소 그 상황에서는 아니었다는 강한 거부감이 들었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이중적인 마음 때문은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라 군을 깊게 잠식하여 부대의 일상은 늘 뜬구름 속에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몽롱한 마음을 깨게 되는 계기는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 야. 너, 라면이라고 불린다며?
- 네? 지금은 아닙니닷.
저도 모르게 훈련소에서나 나올 법한 딱딱하며 자존감은 없는, 반사적인 말투가 그대로 튀어나온 자신에게 더 경악하며 라 군은 순간 자괴감에 빠졌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치 오늘 전입해 온 이등병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팔꿈치마저 반듯하게 펴서 무릎에 댄 채로 의자에 앉은 자기 자신의 몸뚱이를 느끼면서는 아예 저도 모르게 몸뚱이에 새겨진 노예근성 같은 것에 혐오감이 들었다.
게다가. 군복도 아닌 사복 – 사복이라기 도 뭣하지만 그래도 일반 트레이닝 복이니까 –을 입고서 말이다.
- 야야, 너무 긴장하지 마. 그러면 내가 다 쪽팔리잖나. 몸에 힘주지 말고, 그냥 편히, 여긴 부대 아니잖아. 그냥 편하게 해. 임마.
- 아, 아닙니닷.
자신의 몸에 새겨진 거지 같은 노예근성을 혐오하면서도 다시 또 전입 신병 모드가 자연스럽게 가동하는 라 하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인물은 누가 봐도 수상쩍은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머리는 그야말로 서울에 나가면 장발 단속에 걸릴 정도로 길고, 얼굴은 농민처럼 까무잡잡한데 이른바 ‘항공 잠바’를 걸쳤다.
대체 전투기 비행사들은 절대 걸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100% 나일론 재질의 간부형 군용 점퍼.
물론 라 하사도 임관 때 받긴 했지만, 최전방에서 라 하사가 항공 잠바를 입을 일 같은 건 없었다.
늘 야전상의 차림이고, 혹 외출이나 휴가를 나간대도 중사라도 달지 않는 한은 건방지다 조인트를 까이기 딱 좋은 복장.
그런데 라 하사의 맞은편에 앉은 이는 그 항공 잠바에 아무 계급장도 없고, 게다가 군복 바지 같이 보이는 사제바지를 걸치고, 전투화도 보통 장군들이나 신는 겉멋 가득한 지퍼가 달린 전투화를 신고 있다.
그는, 영관급 장교나 장성들도 몹시 꺼리는 ‘보안사’ 소속의 중사.
이른바 ‘부관’으로 지칭되는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보안사라고 하면 군내의 기밀을 취급하고 정보를 다루는 기관으로 알려졌지만, 전방부대에서 그들이 할만한 정보활동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군 정보 사항은 육군본부 직할의 정보사령부에서 담당하고 있고, 보안사는 실제 작전지역으로 들어가는 일이 드물다.
그들은 이를테면 2차 대전 때 나치의 친위대 ‘게슈타포’가 했던 것처럼 현역 군인들의 사상과 성향과 복무 태도를 감시하고 보고하는 일종의 비밀경찰 같은 역할이 진짜라는 걸 아는 간부들은 다 알고 있었고, 라 하사조차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일반 전투부대의 하사 따위는 야산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존재감이 없다.
보안대 중사 급이면 전투대대의 대대장, 즉 중령 이상을 감시한다.
사단장이 별 두 개 이른바 ‘투스타’ 지만 그들은 고작 무궁화 두 개의 지역보안대장에게도 굽신거리는 게 현실이었다.
‘보안사령부’라고 공식 명칭이 있는 그들만의 리그에 뭔가 모호한 보고라도 올라가는 날엔 결코 좋은 일이 없었으니까.
복장도 자유롭고, 아예 계급장도 안 달고 다니는 그들이지만 그들만의 전매특허 같은 공통점은 있었다.
한결같은 긴 머리. 검게 그을린 얼굴. 계급장 하나 없는 항공 잠바. 아랫단에 고무링도 넣지 않은 사제 군복에 장성들이나 공식적으로 신는 지퍼 달린 전투화.
군대에서 지퍼 달린 전투화가 상징하는 바는 크다.
공식적으로 지퍼가 달린 전투화를 배급받는 군인은 찬란한 별을 탄 장성들. 아니면 헬기나 전투기를 타는 조종사들이다.
장성들은 전투화를 신고 뛰거나 구를 일이 없으므로.
조종사들은 물에 빠졌을 때 재빨리 생존 수영을 하기 위해서.
그런데 예외로 공식적인 지퍼 전투화를 신는 이들은 바로 보안대였다.
장교고 하사관이고 보안대를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기보다는 그들과 마주치는 것 자체를 꺼렸다.
군에서 흔히 돌아다니는 속담 중 하나,
‘ 보안대가 진급을 시켜줄 수는 없지만, 진급 대상을 끌어내릴 순 있다.’라고 까지 했으니까.
그리고 라 하사의 맞은편에서 느긋하게 입에 담배를 물고 한껏 건방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남자가 바로 라 하사 소속의 연대를 책임진 보안대 ‘부관’이었다.
라 하사는 입안이 바짝 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