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외주

AI의 배설물 속에서 ‘원본의 나’를 지키는 법

by 실패자클럽

현대인의 일상은 정교하게 기획된 쇼윈도와 같다. 우리는 내가 어떤 실루엣에 안정감을 느끼는지 고민하며 거울 앞에 서기보다, 유명 편집숍이 제안하는 큐레이션을 통째로 결제한다. 내가 어떤 선율에 심장이 뛰는지 탐구하는 지루한 과정은 유튜버의 플레이리스트 한 줄로 대체되며, 미각의 주권조차 별점과 알고리즘의 통계에 자진해서 반납한다. 이것은 효율이라는 이름의 달콤한 간계다.


진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지독하게 비효율적이다. 수많은 실패와 안목의 낭비를 거쳐야만 비로소 '나'라는 형체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낭비를 허가하지 않는다. 결국 현대인들은 이 필연적인 낭비를 견디지 못하고 타인이 가공해 놓은 취향을 단기간에 대여하여, 마치 내 것인 양 능숙하게 연기할 뿐이다. 우리는 지금 효율을 얻는 대신, 가장 고유해야 할 ‘자아’를 도난당하고 있다.


자아의탁, 텅 빈 껍데기들이 벌이는 가면무도회


스스로를 정립해야 할 인간의 의무를 방기한 자리에는 자아의탁이라는 기형적인 괴물이 똬리를 튼다. 이미 완성된 외부의 우상에 자신을 투사하며 값싼 안도감을 얻고. 특정 인플루언서의 라이프스타일에 나의 욕망을 동기화하고, 집단의 승리에 나의 유능감을 대입한다.


그러나 타인의 자아에 기생하는 연기는 결코 나의 성장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붓는 타인의 서사일 뿐이다. 타인의 영광에 열광하고 그들의 몰락에 같이 절망하는 사이, 정작 내면은 외재화된다. 스스로를 아는 공부를 게을리한 대가는 혹독하다. 연극의 조명이 꺼지고 의탁했던 대상이 스러지는 순간, 남는 것은 방향을 잃고 부유하는 텅 빈 껍데기뿐이다.


오염된 컨텐츠


우리는 AI가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감성과 지식을 배설해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생성형 ai의 발전 이후로, 인간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수 많은 사유 대신, 자극적인 반응만을 끌어내는 인공지능의 배설물이 점점 더 많이 생산되고 있다. 알고리즘과 기계적 창작물로 오염된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진짜 사유이고 무엇이 모방된 데이터인지 판단할 기준은 점차 마모되어 간다.


이러한 오염이 가속화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정립해야 할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그 자리를 AI와 알고리즘의 판단에 통째로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나를 아는 과정은 지독하게 느리고 고통스럽지만, 기계가 추천해 주는 취향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편리하고 쾌적하다. 하지만 우리가 판단을 외주 주는 순간, 사유의 근육은 퇴화하고 취향의 주권은 찬탈당한다. 결국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스스로 정의하지 못하는 텅 빈 자아들은, AI가 쏟아내는 정교한 환각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기꺼이 선동당하는 먹잇감이 되고 있다.



자신을 아는 것


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를 지켜줄 최후의 보루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비효율적이었던 ‘자기 자신을 아는 힘’이다. 자아가 단단하지 못한 인간은 AI가 던져주는 정교한 가짜 취향에 가장 먼저 잠식당할 것이다. 내가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진심으로 전율하는지 그 원형을 가진 자만이 기계가 흉내 낸 감정의 파편들을 걸러낼 심미안을 가질 수 있다.


이제 세상이 강요하는 배역을 집어치워야 한다. 빌려온 옷을 벗고, 투박하더라도 내 손으로 지은 삶의 무대로 내려와야 한다. 결국 인간의 존엄은 매끈하게 정제된 효율적 연기가 아니라, 비효율적일지라도 끝끝내 ‘나’라는 원본을 지키려는 고집스러운 투쟁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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