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연인

실패자클럽 단편소설

by 실패자클럽

한적한 주말의 카페, 적당히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친구와 이 여자가 어땠느니, 이번엔 이 주식이 오를 거라느니 하는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고개를 쳐들고

내게 물었다.


"북풍과 태양 이야기 알지?"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초등학생도 다 아는 북풍과 태양이라니... 우리도 이제 나이를 꽤 먹은 사람들인데, 매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나 역시 마땅히 할 말이 없었기에

못 이기는 척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도 있냐?"


"그런데 말이야, 조금 웃기지 않냐? 태양이 북풍을 이길 수 있었던 건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인데."


또 시작이다, 저 눈빛. 매번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면 상대 쪽에서 부담스럽게도 빛나는 저 눈빛.

이야기는 주고받지만, 눈빛은 주고받지 않는 상황. 지겨우리만치 반복되는 일방적인 눈빛.


그리고 무슨 운 때문이란 말인가? 태양이 북풍과의 내기에서 승리한 것은 운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유연한 대처를 했기 때문인데, 이 친구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는 거지? 세상의 모든 성취에는 운이 깔려 있다는 말을 하면서 어울리지 않는 도덕가 행세를 하겠다는 건가?


"운이 좋았다니. 북풍과 태양이 주는 교훈은 단순히 무식하게 힘만 쓰는 사람보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대처가 중요하다는 내용이잖아. 그런데 무슨 운 때문이야?"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강한 바람이 불면 사람은 더욱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웅크릴 뿐이니까. 그런데 말야, 만약 나그네에게 연인이 있었다면?"


"연인이라고?"


"나그네의 곁에 그의 연인이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면, 약한 바람만으로도 그의 코트를 벗길 수 있었을 거야. 나그네가 강한 바람에도 코트를 더욱 여민 것은 그가 여전히 혼자인 나그네였기 때문이지. 그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약한 바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연인을 위해 기꺼이 코트를 벗어 던지지 않았을까?"


친구의 말은 카페 안의 소란스러운 공기를 단번에 가라앉겼다. 실없는 주식 이야기나 읊조리던 입술에서 나온 것치고는 지나치게 낭만적이었고, 동시에 서늘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미 식어버린 아메리카노의 쓴맛만이 혀에 감돌았다.

친구는 내 반응을 즐기듯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말을 이었다.


"북풍이 아무리 몰아쳐도 나그네가 코트를 여밀 수밖에 없었던 건 그 옷자락 안에 있는 게

자기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코트는 더 이상 방어벽이 아니라 상대방을 덮어 줄 수 있는 나그네의 마음이 되었겠지."


몇마디를 더 떠들어대는 친구를 무시하고 창밖을 지나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외투 깃을 바짝 세우고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과연 저들 중 몇 명이나 자신의 코트를 기꺼이 벗어 던질 준비가 되어 있을까?


"결국 북풍이 진 진짜 이유는 운이 나빠서가 아니야. 나그네가 고독했다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지. 북풍은 인간의 생존 본능을 건드렸지만, 사랑은 그 본능마저 뛰어넘게 하니까. 야, 생각해 보면 좀 슬프지 않냐? 자신을 기꺼이 벗겨 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친구의 눈빛은 여전히 부담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오글거리니까 그만해라"라고 면박을 주었을 텐데, 이번만큼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카페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신경을 긁는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내 머릿속에는

북풍이 몰아치는 황량한 길 위에서 사랑하는 이를 위해 스스로 단추 하나도 풀지 못하는 한 남자의

뒷모습만이 그려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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