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브뉘엘
브뉘엘의 1928년 작품 <안달루시아의 개>는 의식의 흐름대로 제작된 초현실주의 영화이다. 이 영화는 기존에 내러티브 서사로 발전해 온 영화사에 반하는 형식을 취한다. <기억의 지속>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각본을 작업했다.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요지는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세계를 영화로 연출한 ‘초현실주의 영화’라는 점이다. 1920년대 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이후 유럽에서는 ‘다다’라고 불리는 예술운동이 시작되었다. 다다이즘은 반 이성주의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이성’이란 사회구조 안에서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제도를 뜻했으며, 다다이즘은 이러한 ‘이성’ 자체를 의심하고 허물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다다이즘은 초현실주의에 큰 영향을 끼친다. 다만 ‘다다운동’은 이성을 파괴해 예술인에게 충격을 주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면, ‘초현실주의’는 이성의 이면, 인간의 무의식에 방점을 찍었다.
저명한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절대 이성을 무너뜨리려는 자세를 취하는데, 이성에 반기를 드는 이 행위는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의 근간이 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영화가 아니라, 기존의 서사 구조에서 탈피된 방식으로 영화를 구성하고 있다. 줄거리 자체를 설명하기는 어렵고, 파편적인 영상들로 영화를 묘사할 수 있다.
영화는 남성이 면도칼을 들고 있는 장면과 보름달이 구름을 지나가는 장면을 교차 편집한 후, 남자가 여자의 눈알을 베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6년의 세월이 흐른다. 이상한 복장을 한 남자가 등장하여 갑작스레 쓰러진다. 아파트에서 그를 발견한 여자는 쓰러진 남자를 부둥켜안다가 자신의 가방을 갖고 집에 돌아온다. 그러던 도중 또 다른 남자가 집에 들어와 여자를 겁탈하려 하고, 여자는 테니스 라켓을 집어 들어 그를 막으려 한다. 그 순간 남자는 줄을 당겨 두 명의 신부와 그랜드 피아노를 끌어당긴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 이전에 쓰러졌던 이상한 복장의 남자가 깨어난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그를 찾아온 낯선 이에 의해 혼나고 벌을 받는다. 시간은 다시 17년 전으로 돌아가고, 남자를 벌주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에게 총을 쏴 죽인다. 한편, 여자는 방문을 열고 어디론가 들어간다. 문 너머에는 바닷가가 있고 또 다른 남자가 서 있다. 그녀는 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시간은 봄으로 바뀌고, 즐겁게 놀던 그들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묻혀 시체로 발견되며 영화가 끝난다.
이 영화의 의미를 서사로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되는 자동기술법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대신 몇 가지 장면에 집중해 영화가 상징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주목할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오프닝 시퀀스이다. 면도칼을 갈고 있는 남성과 교차되는 구름이 보름달을 가로지르는 장면, 이후 남자가 면도칼로 여자의 눈을 베는데, 이때 동그란 눈동자와 둥근 보름달이 오버레이되고, 면도칼과 얇은 구름이 비슷하게 연상되어 두 장면이 이미지적으로 연결된다. 다소 충격적인 이 오프닝 시퀀스는 ‘눈’의 의미를 중심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눈’이 가진 기존 이미지는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다. 어쩌면 카메라 옵스큐라와 같이 사물과 세상을 객관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초현실주의’라는 바탕을 염두에 두고 이해했을 때, 이성에 대한 반기를 드는 연출을 선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남자의 손바닥에 뚫린 구멍 안에서 개미 떼가 우글거리는 장면이다. 이번에도 오프닝 시퀀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영화는 손바닥 위의 개미 떼와 유사한 이미지를 가진 장면들을 나열한다. 여자의 겨드랑이털, 성게, 잘린 손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검정 옷의 군중들. 갑작스럽게 등장한 개미와 클로즈업의 사용은 기존에 이해하고 있던 영화 문법안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 인물의 등장과 여자와의 관계 또한 여전히 ‘물음표’일 뿐 확실하게 이해시켜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장면의 상징하는 바를 추측해 보자면, ‘개미’는 일종의 환각 증상을 뜻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 <올드보이>에서도 환각 속 개미가 반복하여 등장한다. 미도는 거대한 개미를 보고, 대수는 교도소에서 개미 환각에 시달린다. 환각 증세는 우울증과 고독으로 생겨나기도 하는데,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또한 우울하고 고독한 심리상태가 무의식에서 솔직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참고 | https://youtu.be/VdWYJF7jaBc?t=149 영화<올드보이> 지하철 개미씬
사실 <안달루시아의 개>는 관객들이 ‘해석’ 하는 행위 자체를 방해하고 있다. 유럽의 허무주의, 냉소주의 시각에서 합리적, 논리적 태도를 중시했던 기존 관습을 거부하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영화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답답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그저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한 작품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오프닝 시퀀스만 보고 고어 영화로 알고 꺼버리는 사람도 대거 있지만, 기존 내러티브에 반기를 드는 이 영화는 영화사에 ‘초현실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을 개척한 작품이다. 불친절하지만, 그렇기에 각 장면이 상징하는 바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안겨 주는 작품이다.
[참고자료]
David Bordwell, Kristin Thompson 『영화예술』, 주진숙, 이용관 옮김, 지필미디어; 지필출판사, p.575 , 2011
노시훈 ”〈안달루시아의 개〉의 전복적 특성과 초현실주의”, 문학과영상2(2),p201-220, 2001
조광석 "60년 대 Jean-Luc Godard의 영화에 나타난 초현실주의의 영향 부제: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의 영향", 기초조형학연구, vol.5, no.4 pp.407-41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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