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도구 : 예술 1 시립미술관 고흐 미술전 관람 후기
비오는 토요일, 가족들과 함께 수목원을 산책하고, 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고흐전을 방문했다. 비오고 바람이 부는 날 오랫동안 산책하기도 어렵고, 적당히 몸과 마음이 따뜻한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른 입장료는 1인당 22,000원. 이름값에 비해 가격이 무난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은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의, 가장 비싼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
다행히 비가 오는 날이라 그런지 입장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입장하자마자 바로 뒤에 긴 줄이 생기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림을 편하게 감상하기에는 힘들어졌다. 한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보다는 그냥 파도에 밀리듯 밀려나갔다.
또 아쉬운 것은, 고흐의 그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인 ‘별이 빛나는 밤에’나 ‘해바라기’ ‘ 꽃피는 아몬드나무’와 같은 그림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그 외에 ‘착한 사마리아인’이나 ‘자화상’ ‘감자먹는 사람들’과 같이 미술 책에서 보았던 작품들을 실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어쨋든 나는 이제, 불멸의 화가 고흐의 진짜 그림들을 눈 앞에서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사실 나와 같은 아마추어의 눈으로 이 그림들이 왜 유명하고, 왜 잘 그린 그림인지, 솔직히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누구나 한 번쯤은 보고 싶어하는 그림이니까 한번은 봐주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입장했지만 아쉬움이 컸다.
물론 고흐의 그림이 후기 인상주의에 속한다는 것이나, 화가의 삶이 매우 파란만장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상의 환경은 물론, 안목의 부족까지 겹쳐서 뭐 그리 엄청난 전율과 감동까지 있었다고는 말하기 부끄러운 지경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미술관에 들르기 전 가족과 함께 걸었던 수목원의 정경이 훨씬 더 아름답고 감동적인 예술이었다. 비가 오는 이유로 사람이 거의 없는 넓은 수목원을 우리 가족이 독차지하고 걷는 기분은 매우 독특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걷는 것은 상당히 낭만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비싼 돈 내고 감상한 미술관 후기가, '유명한 작가의 비싼 그림을 나도 보았다'로 끝나면 안 될 것 같아, 집에 가서 다시 한번 더 보자는 마음으로, 오만원을 주고 전시작품 '도록'을 사가지고 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찬찬히 읽으며 그림을 다시 보았다. 여기에다가 유튜브 영상도 찾아보면서 그의 일생과 정신 세계도 몇 개 더 찾아보았다. 이러한 사소한 노력만으로도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니, 그림을 보는 안목이 조금은 더 확장된 것 같다.
무엇보다 더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유명한 것 이상으로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실력 이상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스토리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스토리텔러가 있어야 했다.
고흐라는 위대한 작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의 동생 '테오'와 테오의 아내 '봉허'가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반트 주의 그루트 쥰데르트(Groot-Zundert)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는 개혁교회의 목사였고, 어머니 안나 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는 조용한 성격의 무명 화가였다.
그러나 고흐의 출생에는 특이한 배경이 있다. 그의 생일과 이름은 1년 전에 죽은 형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는 매년 자신의 생일날이면, 출생의 기쁨보다 죽은 형의 무덤을 돌보는 가족의 모습을 보아야 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고흐는 자신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살았을 것 같다. 또한 그의 부모들은 1년 전의 불행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고흐를 지나치게 과보호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고흐는 뇌전증(간질)과 같은 유전병도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흐가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이유도 이런 병 때문이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원인이 무엇이든, 이후 고흐의 생애는 한 마디로 파란만장했다. 15세가 되던 해, 삼촌이 운영하던 구필화랑에 그림을 판매하는 영업사원(화상)으로 취직하기도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또한 직업뿐 아니라 그의 사랑은 극단적이고 매우 서툴렀다. 다만 이때 다루었던 많은 그림들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화가의 길에 들어서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고 한다.
화상을 그만두고는 아버지와 같은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으나 신학대학에 낙방을 하고, 탄광촌의 전도사로 일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친 열정이 오히려 광신적이라는 오해를 받아 재계약에도 실패한다. 하는 일마다 어려움을 겪던 고흐는 결국, 동생 테오의 추천으로 화가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10년 동안 한결같은 열정으로 무려 1,500여 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는 거의 매일 그림만 그리며 살았던 것이다.
그의 그림은 크게 초기와 중기 후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1880년 형의 재능을 알아본 동생 테오는 형이 화가의 길에 들어서기를 바라며 그에게 경제적인 후원도 해준다. 고흐는 정식으로 미술을 배워 본 적이 없었지만, 자신의 친인척이었던 '안톤 마우베'로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밀레의 ‘만종’에 큰 영감을 받아 자신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농부들이나 광부들의 일상적인 삶을 그림에 담고자 노력했다.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다.
이 그림도 실제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림으로, 그는 자기의 그림을 통해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을 그림에 담으려고 했다. 고흐는 이 그림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과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테오는 이러한 형의 그림이 걱정되었다. 이런 그림으로는 절대로 파리지앵의 고객들이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화단에서는, 사진의 등장과 함께 등장한 인상주의 밝은 화풍의 그림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던 것이다.
참고로 서양의 미술사에서는 고흐가 화가로 등단한 1880년을 기점으로 휴대용 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렇게 사진의 대중화로 인해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던 화가들은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어떤 화가도 사진보다 더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에 화가들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인상주의 화풍이다. 인상주의는 빛의 회화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색채와 빛을 통해 찰나의 시각적인 감각, 자신의 주관적인 인상을 표현하려고 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마네’와 ‘모네’, ‘르누아르’와 같은 작가들이 있다. 원체 유명한 화가들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이 시기 사진의 등장으로 화가들의 화풍은 ‘실상’에서 ‘인상’으로 그리고 다시 이후에는 ‘추상’으로 점점 변해갔다.
당시 프랑스에서 잘 팔리던 그림이 이와 같은데, 고흐의 그름은 온통 어둡고,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의 거칠고 찌든 얼굴을 그려놓았으니, 당시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동생 테오는 형을 프랑스 파리로 불러 들여 당시의 화풍을 배우도록 배려한다. 그래서 고흐는 1886년에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에 살면서 수많은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미술수업을 받게 된다. 이 시기의 그림들에서 꽃과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들이 많이 그려진다. 그리고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식당 내부’와 같은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을 보면 후기 인상주의의 점묘법이 고흐의 그림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자화상을 많이 그리는 화가들이 심리적으로 나르시시즘이 강하다고 평가하지만, 사실 고흐가 '자화상'과 '꽃 정물'을 많이 그린 이유는 비싼 모델을 고용하기 어려운 경제적인 문제가 컸다고 한다.
한편 이 당시 고흐의 그림에 영향을 준 것 중의 하나가 일본의 석판화라고 한다. 파리만국박람회 전후로 유입된 수많은 일본의 그림에 고흐도 큰 감동을 받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고흐의 파리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그는 이 시기에 화가로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동료 화가들과의 관계는 매우 불편했다. 특히 비주류 화가로서, 동료 화가들의 비평과 비판에 불같이 화를 내며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프랑스 화단에서 고흐는 매우 괴팍하고 함께 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 이유가 질병에 의한 것이든 타고난 성격때문이든, 어쨋든 고흐는 인간관계에서는 늘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파리를 떠나 프랑수 남부의 지방인 ‘아를’로 떠나게 된다. 이 시기의 고흐에 대해서는 ‘도록(圖錄)’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아를에서의 그의 꿈은 원대했다. 그는 위대한 색채 화가로서의 성공을 예견하면서 죽어야만 빛을 발하는 화가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남프랑스의 아뜰리에’라는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자신의 이상향을 실현하고자 적극적인 작업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고갱과의 비극은 이 같은 그의 이상이 빚어낸 결과이다. ‘노란 집’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그는 10월 23일 파리에서 도착한 고갱을 맞이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엄청난 양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2월 23일 그를 떠나려는 고갱에 대한 집착은 급기야 자신의 귀를 자르면서 그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반 고흐의 아를 시기는 그의 생애에서 작업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이자 반 고흐의 주요 걸작들이 탄생하는 풍요로운 시기였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안고 병원을 드나들던 일 년 남직한 아를에서의 체류 동안 자그마치 187점의 유화 작품이 그려졌다.
고흐의 '아를' 시기에 가장 유명한 작품들이 대거 출현하는데, ‘별이 빛나는 밤에’와 ‘꽃 피는 아몬드 나무’와 같은 대작들이 모두 이 시기의 그림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 그림들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인 ‘착한 사마리아인’과 ‘슬픔에 잠긴 노인’은 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강도를 만난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는데, 그 공허한 눈빛과 함께 착한 사마리아인에게 자신의 온몸을 맡긴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 그림을 감상하고 나오며 큰 딸은 ‘슬픔에 잠긴 노인’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옅은 파랑색의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흐느끼는 노인의 모습에서 고흐의 슬픔을 읽은 것 같았다. 이처럼 고흐는 그의 그림 속에 매우 절박하고 외로운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후 고흐는 아를을 떠나 생의 마지막 70일을, 파리 북부의 오베르라는 마을에서 지내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끝으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이 그의 죽음을 암시한다고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까마귀가 죽음을 상징하는 한국적인 해석일 것 같다. 다만 고흐는 이처럼 생긴 밀밭에서 충동적인 자살 시도를 하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한 그림이기는 하다.
어쨋든 오베르에서의 70일 동안 그는 오직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그렇게 70일 동안 완성한 그림이 80여 점에 달한다고 하니,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다분히 열정 이상의 무서운 집념과 광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왜 고흐 전시회의 부제가 위대한 열정(The great passion)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반고흐가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고흐의 동생인 테오와 그의 아내 ‘요안나 봉허’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생각한다. 테오와 봉허가 없었다면 고흐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작가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고흐가 살아있는 동안 ‘테오’ 때문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고흐가 죽어서 유명해진 것은 테오의 아내 ‘봉허’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교생활도 목회생활도 실패하고, 극단적으로 보이는 사랑도 실패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 하던 고흐에게, 테오는 화가의 삶을 권했다. 그리고 일정한 생활비와 그림 재료를 무한정 제공해 주었다. 동생 테오가 왜 그렇게 형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헌신할 수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동생 테오의 입장에서는 형이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방황하며 사는 삶이 매우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겨졌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형이 어떻게든 재기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화상(그림 판매상)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활용하여 재정적인 지원은 물론, 많은 화가들과 교류하며 발전하고 성공하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테오가 적극적으로 형을 지원하면 할수록, 고흐는 반대로 동생에 대한 채무의식과 함께 미안하고 조급한 마음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후반기에는 동생 테오도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지고 가족도 챙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고흐는 더 빨리 그림으로 성공해 자립하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그 이유로 수많은 습작을 매일 그렸다고 한다. 그의 다작은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생의 노력과 지원에도 불구하고 고흐의 그림은 화단에서 여전히 인기가 없었다.
오늘날에는 최고의 개성으로 평가되는 고흐의 그림은, 임페스토 기법으로 물감이나 두껍게 칠하는 수준 낮은 화가의 그림으로 치부되기 십상이었다고 한다. 유일하게 판매된 것으로 알려져 유명해진 ‘붉은 포도밭’도, 안나 보쉬라는 미술 수집상이 불쌍해서 하나 사준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테오는 갓 태어난 자기 아들의 이름에 형의 이름을 붙여준다. 이것도 매우 특이하기는 한데, 어쩌면 테오는 형이 죽은 형의 이름을 물려받아 힘들었던 것을 이해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은 형이 아닌, 희망과 생명의 상징인 자기 아들의 이름에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붙여 주어 형을 응원한 것처럼 보인다. 이에 고흐는 너무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꽃피는 아몬드 나무’ 그림을 그려서 동생에게 보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테오는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자기 마음대로 재정을 형에게 무작정 보내기 어려운 지경에 놓인다. 이런 상황을 아는 고흐도 심리적으로 더욱 쫓기게 되고, 결국은 자신이 아무 쓸모없는 존재라고 말하며 극단적인 자기 혐오감에 빠지면서, 권총으로 자기의 가슴을 겨누었다.
밀밭에서 자기 가슴에 총을 쏜 고흐는 바로 죽지는 않았다고 한다. 상처입은 몸을 이끌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 죽기 전에도 극심한 고통을 견디다가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한다. 고흐는 죽기까지 처절한 고통 속에 삶을 마무리 한 것이다.
그리고 형이 죽은 그 해에 테오도 극심한 환각과 두통에 시달리며 형과 같은 증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1891년 1월 25일에 사망을 한다.
이후, 테오의 부인이었던 ‘봉허’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그녀는 남편과 고흐의 편지를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출판을 한다. 수백통의 편지에는 형을 응원하는 동생 테오의 마음과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고흐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봉허는 이 책과 더불어 고흐의 그림을 매우 적극적으로 알리는 전시회를 기획한다. 그리고 고흐의 그림에 마음을 닫았던 사람들이 편지의 내용을 접하면서 마음을 활짝 열기 시작했다. 그림 하나 하나에 깊은 감동과 스토리가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고흐의 그림은 점점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어려운 그림조차 편지와 함께 배경을 알고 보면, 그 감동과 이해가 너무나 깊이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흐의 그림은 이런 과정을 거쳐, 물감만 두껍게 사용한 초등학교 수준의, 제대로 그림을 배우지 못한 수준 낮은 그림이 아니라, 위대한 열정을 가진, 새로운 화풍을 창조한 위대한 화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게 되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위 말은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兪漢雋)이 남긴 명언이라고 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이 말을 조금 고쳐서 문화재나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올바른 태도로서 이 말을 강조했다.
우연히 수목원을 산책하다가 들른 '고흐전'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밀려다니느라 제대로 감상하기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명작을 실제 눈 앞에서 감상했다는 경험과 함께, 고흐의 일생과 더불어 그의 미술세계를 살펴본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앞으로 고흐의 그림을 보게 되면, 이전과는 다르게 새로운 것들이 보일 것 같다.
'별이 빛나는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