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책읽기 - 독서모임 4
네 번째 읽을 책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과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탐구하는 인문학의 도구로 손색이 없는 인문고전들이다. 우리는 사회 체제 안에서 존엄한 인간으로서 살고 있는가? 수단이 아닌 목적 자체로 인정받고 있는가? 또한, 나는 나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존중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이익의 관점에서, 필요와 조건만 따지면서 서로를 소외시키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카프카의 일생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6년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07년 프라하의 보험회사에 취업했다.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 키얼링(Kierling)에서 사망하였다. 카프카는 사후 그의 모든 서류를 소각하기를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 등을 출판하여 현대 문학사에 카프카의 이름을 남겼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억세고 독선적이었다고 한다. 아들에게 틈만 나면 "나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만큼 해냈는데, 부족한 게 없는 너는 왜 그렇게밖에 못하냐?"며 몰아 붙였고, 카프카는 이러한 아버지의 말에 열등감과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더구나 어머니 율리도 남편의 사업을 도와 하루 12시간씩 일하느라 평일에는 부모 모두 집에 없었고, 카프카와 그의 형제들은 보모와 하인들이 돌아가며 키웠다. 카프카의 이러한 성장과정은 『변신』이라는 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변신』은 평범한 외판원이던 주인공이 벌레로 변한 뒤 가족과 사회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버려지는 과정을 그린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를 충격과 혼란 속에서 지켜보던 가족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짐스럽게 여기고 끝내 죽음으로 내몬다.
그레고르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존재였다. 그는 외판원으로 힘들게 일하며 상사의 감시에 시달렸지만, 가족을 위해 묵묵히 감내했다. 그러나 벌레로 변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은 그제서야 생계 방안을 강구하면서 점차 그를 외면한다. 아버지는 경비원 업무를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은 벌레로 변한 아들에게 사과를 던져 죽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그를 보며 불쌍하게 여기지만 무기력한 태도로 일관하다 쓰러진다. 여동생 그레타는 처음엔 동정심을 보이다가 점차 그를 혐오하며 “이건 더 이상 오빠가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최종적으로는 그레고르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안도하며 가족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외출을 한다.
이러한 서사는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조차 자본주의적 기능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준다. 정서적 유대는 효율성과 노동력 앞에서 무너지고, 노동력이 상실되면 부품처럼 버려지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원체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카프카의 『변신』은 여러 관점에서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특히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부조리한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의 삶을 그린 소설로 해석해 왔다. 그리고 이외에도 이 소설은 여러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그레고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를 당하면서도 허위의식에 빠진 전형적인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로 묘사된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노동력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다. 하지만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즉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거될 위기에 놓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희생과 착취를 당연하게 여기며 체제에 순응하는 모습은 ‘허위 의식’ 개념을 보여준다.
도저히 출근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불성실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을 염려하며 불안해 한다. 그리고 집에까지 찾아 와서 가족들 앞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지배인에게는 어떻게든 해명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가족들도 자식의 안위보다 지배인에게 더 잘 보이려는 태도를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는 가족 안에서도 계급이 나뉘고 착취가 일어난다. 아버지는 일을 할 수 있었고, 심지어 모아 둔 돈도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온전히 '그레고르'의 노동에만 의지해 살았다. 그레고르는 가족에 의해 착취를 당해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의 태도를 이해하고 가족들이 처참한 환경에 내몰리지 않는 것에 안심한다.
둘째, 정신분석 비평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레고르의 변신은 무의식의 상징적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가족과 사회의 요구에만 부응하며 살아왔고, 사랑(에로스)의 욕망이나 자유와 같은 욕망을 억압하며 살았다. 다만 문을 걸어 잠그는 소극적인 자유와 함께, 그 공간 안에서 벽에 걸린 여인의 사진을 쳐다보는 행동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산다.
하지만, 억압된 욕망은 더 이상 통제되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만다. 그의 '변신'은 자아(Ego)가 초자아(Superego)와 이드(Id)의 활성화에 무릎을 꿇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벌레가 된 그의 모습은 자기를 억압했던 자본주의 사회와 아버지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자기혐오와 죄책감의 양가감정을 형상화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각한 불안과 회피의 심리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점차 가족들마저 외면하는 상황에 좌절하면서 '타나토스'라는 ‘죽음 충동’에 지배당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거세 당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의 관계가 불편했던 경험도 소설 속에 상당히 많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셋째, 구조주의적 비평의 관점에서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이항 대립' 구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조주의 이론은 숨겨진 대립 구조를 찾음으로써 대상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핵심이다. 특히,『변신』은, 인간/벌레, 말/침묵, 방 안/ 방 밖, 쓸모 있음/쓸모 없음, 정상/비정상 등의 이항 대립의 요소를 다른 작품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항 대립은 소쉬르의 구조주의적 이론에서 유래하였다.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의 단위는 이항 대립을 수단으로 하여 의미나 가치를 가지며, 각각의 단위는 마치 바이너리(이진법) 코드 안에서처럼 다른 용어와의 상호적인 결정 안에서 정의된다. 이것은 모순되는 관계가 아니라, 구조적이고 보완적인 관계이다. 소쉬르는 어떤 기호의 의미는 그 맥락과 그것이 속하는 모임에서 파생된다고 입증하였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악'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선'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
이를 통해 보면, 『변신』은 인간과 벌레의 이항대립을 중심으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가족 공동체의 의미가 무엇인지 밝힌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사회구조가 인간이라는 '기호'와 '의미'를 상실한 '벌레' 같은 존재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전통적 서사 구조를 해체하고, 갈등-극복-해결이 아닌 해체-소외-소멸의 흐름을 따름으로써 전통적인 질서와 구조 자체에 대한 의문과 저항을 시도한다고 분석되기도 한다.
이처럼 『변신』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소쉬르 등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그러나 비평의 방법은 다양해도 해석은 대개 하나로 귀결된다. 『변신』은 단순히 한 개인이 벌레로 변했다는 기괴한 이야기가 아니라, 근대 사회의 억압적 구조와 인간 존재의 위기, 그리고 조건적 관계로 맺어진 가족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비판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카프카의 『변신』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노동력이 아닌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귀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인문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빅터 프랭클(1905~1997)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유대인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이며, ‘로고테라피’(의미 치료)의 창시자이다. 젊은 시절부터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영향을 받았으나, 인간은 쾌락이나 권력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독자적 관점을 발전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아내와 부모를 모두 잃었다. 하지만 그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인간의 가능성을 확신했다. 이 경험은 대표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집약되었으며, 이후 그는 전 세계를 돌며 로고테라피를 전파하며 실존 심리학의 거장으로 평가받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단순한 전쟁 체험기나 생존 수기를 넘어, 인간이 '벌레'만도 못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아우슈비츠라는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며, 저자가 발견한 것은 단순한 생존의 기법이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응답이었다. 책의 내용은 수용소 생활에 따른 심리적 흐름에 따라 세 단계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충격과 공포의 시기이다. 프랭클은 당시의 경험을 '감정의 마비'라고 표현한다. 나체로 탈의를 하고 머리를 깍인다. 그리고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과정에서 그는 인간이 어떻게 자존감을 잃고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는지를 서술한다. '이건 꿈일 거야'라고 되뇌며 현실을 부정하던 그와 동료들의 모습은, 인간이 극단적 상황에 갑자기 처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여준다.
두 번째 단계는 수용소 생활에 익숙해진 시기이다. 생존을 위한 것 외에, 그동안 누렸던 보편적인 감정이 거의 사라지고 무감각이 지배하는 시기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폭력과 노동, 굶주림 속에서 동료의 죽음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방금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의 시체와 눈이 마주쳐도 슬프지 않으며, 동료의 처절한 눈물 앞에서 게걸스럽게 부스러기 빵을 먹기에 바쁘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생존 본능 외의 감정을 최소화하고, 심지어 희망조차 억제한다. 기대는 곧 절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 헛된 희망을 품었다가 그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 더 많은 사람들은 죽어 나갔다.
하지만, 이 무감각 속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벌레'와 같은 삶을 거부하면서 자기 내면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프랭클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리며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풀 한 포기가 자라는 일상의 경험에도 의미를 두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희생정신을 보여주기도 했다.
세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서 해방된 후의 심리 상태이다. 처음에는 자유가 실감나지 않아 웃지도 울지도 못한다. 이어지는 감정은 허탈과 혼란, 그리고 현실과의 괴리감이다. 자유는 단순한 해방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유를 누릴 능력을 잃은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고, 세상은 여전히 잔인했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도덕적 충격이었다. 선한 사람들이 죽고, 악한 사람들이 살아남은 현실, 돌아온 세상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편견과 냉대는 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새로운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또한 자기가 당한 만큼 복수하고 말겠다는 파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프랭클도 이러한 경험을 똑같이 경험하면서 괴로워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경험과 극복의 과정을 통해 '로고 테라피(의미 치료)'의 개념을 정립하게 된다. 로고테라피의 핵심은 ‘쾌락’이나 ‘권력’이 아닌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왜 살아야 하는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니체의 말처럼, 빅터 프랭클은 우리가 당면한 고통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책임과 의미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부조리한 세계에 의미없이 던져진 존재든지 아니면 분명한 목적을 부여받은 존재든지 간에, 공허와 불안감에서 해방되길 원한다면 분명한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찾으라는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에서 거대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날 우리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물리적인 수용소에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많은 현대인들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로 무의미와 무기력의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또한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처럼, 어느날 갑자기,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철저히 소외당한 채로, 삶의 욕망과 의미를 잃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3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약 54만 명의 청년이 고립·은둔 상태에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는 전체 청년의 약 5.2%에 해당하며, 2년 전보다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라고 한다.그 이유로는 취업 실패로 인한 반복된 경험이나, 가정과 학교 폭력의 경험과 대인관계의 어려움, 핵가족화와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청년들이 정서적으로 고립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녀와 배우자를 떠나 보낸, 독거노인들의 삶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외로움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어려움도 가중되다 보니, '죽음의 수용소' 이상으로 고통스럽거나 진짜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사는 이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어느 덧 나도 인생의 후반기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최근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수명은 80.6세이고, 여성의 평균수명은 86.4세라고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내가 살아내야 할 시간은 길고도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인생 후반기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나도 어느 날 일어나 보니, 거대한 벌레로 변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그런 상황이 된다면, 그때 나는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