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의 나무들

--- 왕릉 산책 일기

by 물푸레

프롤로그--

장릉이 가까이 있는 신도시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집을 나서서 40분 정도만 걸으면 잘 가꿔진 장릉 숲을 만날 수 있다.


릉을 한 바퀴 돌고 나서는

원앙이 떼 지어 살고 있는 저수지의 벤치에 앉아서 원앙과 오리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멍 때리며 바라본다.

화려한 색감의 원앙 수컷은 수수한 암컷 앞에서 꾸꾸 소리와 함께 요란한 날갯짓을 하며 구애한다.

흰 뺨 검둥오리들이 하늘을 날다가 물 위로 미끄러지듯이 슬라이딩한다.

저수지는 새들이 노니는 대로 물의 문양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쯤이면 뜻밖에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생각을 쉬고 오감으로 자연을 흡수했기 때문일까?

친구는 멍 때리기가 정신과 의사들이 추천하는 자가치료법이라고 한다.


숲에 들면

모자를 벗듯이 머리를 내려놓고 나는 온몸으로 숲을 받아들인다.

코로 깊숙이 숲의 향기를 들이마신다.

나의 세포는 신선한 공기로 가득 찬다.

귀를 열어 작은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새소리를 구분할 수 있으니 너무 행복하다.

왠지 그 녀석들과 친밀한 사이 같다.ㅎ

뺨에는 따스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 스친다.


손을 내밀어 거친 질감의 나무 둥치를 쓰다듬는다.

나무마다 수피의 무늬와 질감이 다르다.

살구나무 고목은 표범의 잔등 같았고 소나무는 거북 등껍질 같다.

든든한 나무의 가슴을 안아본다. 내 존재가 든든해진다.

내 발이 뿌리를 내리는 상상을 하며 나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숲에서 내 존재는 충만하다.

더 바라고 싶은 게 없다.

물 위에 떠서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도 이런 충만감을 느꼈다.

우리는 원래 청정한 존재.

우주가 보내 준 선물을 운동화만 신으면 이렇듯 손쉽게 받을 수 있다.


흘러넘치는 이 충만감을 혼자 누리기 아깝다.

이웃들에게도 이 행복을 나누고 싶다.

넘쳐나는 물질 속에서 행복하지 않은 현대인들에게

숲을 함께 누리자고

우주의 선물을 함께 받자고

손을 내밀어 본다.


'숲으로 오시지 않으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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