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산책 일기
오후 5시면 해가 진다.
하루가 짧다.
짧은 해를 아쉬워하며 외출을 서두르지만
오후에 출근하는 작은 아들 밥을 차려주고 나서면 어김없이 3-4시이다.
챙겨 먹으라 할 수도 있는데
어쩐지 따듯한 밥을 먹여서 내보내야 내 마음이 편하다.
장릉산 산길을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장릉 저수지에 이른다.
저수지에는 살얼음이 살짝살짝 얼어서 물 위에 문양을 만들고 있다.
애교를 부리며 날갯짓을 하던 원앙 무리들을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하얀 백로 한 마리만 저물어가는 저수지를 지키며 외로이 서 있다.
릉 주변의 빈 땅에는 황량한 겨울 풍경들이 버려진 채 남아 있다.
채소를 기르던 작은 비닐하우스는 찢어진 채 바람에 펄럭이고
밭고랑에는 버려진 배추 잎사귀들이 나뒹군다.
운이 나쁜 키 작은 나무는 가시박의 마른 덩굴을 흉물스럽게 뒤집어쓰고 있다.
어쨌든 쓰임을 다 마치고 휴식하는 시간이다.
나무들은
먹여 살리던 그 많은 잎사귀들을 훌훌이 털어내고 이제 본연의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나무를 바라보며 노년의 초입에 선 내 모습을 돌아본다.
혹독한 겨울을 맞기 전에
떨굴 건 다 떨구고 받아들일 건 다 받아들여야 한다.
뿌린 씨앗의 결과는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겨울은 나무의 실루엣을 감상하는 시간이다.
나무마다 가지고 있는 선들은 각각의 예술 작품이다.
허리가 굽어서 물에 곧 빠질 것 같은 소나무의 선을 따라가며
햇빛을 쫓느라 애쓴 고단한 흔적이 안쓰럽다.
오래된 느티나무의 가늘고 고운 잔가지들은 선이 고운 시스루 느낌을 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마다 그려내는 가는 선들이 각자 음악 소리를 낸다.
산책로 입구에는 '카페 마중'이라고 나무 팻말을 단 카페가 있다.
주택 앞에 비닐하우스 집을 길게 만들고
장작을 태워 난로를 피우고 커피도 팔고 잔치 국수도 판다.
벌판에 피어오르는 카페 굴뚝의 연기가 파마머리처럼 긴 곡선을 만들며 시간 속으로 흩어진다.
나무 타는 냄새가 몸으로 스며들며 쓸쓸한 겨울 마음을 따스하게 채운다.
왕릉 턱 밑까지 아파트가 들어섰다
왕릉은 주산(뒷산)과 조산(앞산)이 일직선으로 마주 보아야 하는데
아파트 단지가 왕릉의 조산을 가리는 바람에 소송까지 벌어졌다.
아파트 숲에 밀려 사라져 가고 있는 빈땅들 사이에서
버려진 것처럼 남겨진 이 땅이 정말 귀하게 느껴진다.
집에서 걸어 얼마 되지 않은 곳에
낙엽 냄새, 장작 태우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시골이 남아 있다니...
일상이라는 돌더미에서 사금파리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나무 벤치에 앉아서 깊은 숨을 들이쉰다.
나무 향기가 폐 속으로 깊숙이 스민다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보니
팥배나무 열매가 빨간 열매를 조롱조롱 달고 있다.
아! 어여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