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만나는 시간

-- 산책 일기

by 물푸레


'올봄에는 가고 싶구나.'

올해 아흔이 되신 어머니는 어눌한 말을 한마디씩 이어가신다.

이제 말은 더 느려지고 음식이나 물을 삼키면 사래가 자주 걸리신다.

한쪽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하시고.


그래도 여전히 어머니는 소녀처럼 고우시다.

좋아하는 분홍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요양원에서 잘라주는 머리는 맘에 안 들어 밖의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고 오신다.

지난달에는 파마가 힘들어서 돌아와서 우셨다고 한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멋은 어머니의 자존심이다.


어머니 손을 꼭 잡고 단어를 몇 개를 건져서 간신히 대화를 나눈다

면회가 끝나고 어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방으로 올라가신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어머니의 봄은 몇 해나 남았을까 생각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경안 습지에 들렀다.

오래전에 새 탐조를 온 적이 있었는데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이제 나도 늙어가는지... 기억이 드문드문 이어진다.

아파트와 상가 도로들이 줄줄이 이어지다 팔당대교로 들어서며

넓고 가득한 물과 농담을 달리하며 겹겹이 펼쳐진 아름다운 산세에 나는 놀란다.


멀리서 가마우지 두 마리가 날개를 말리려는지 오랫동안 두 날개를 펼치고 있다.

엉덩이가 무거워 우다다다... 한참을 뛰다 날아오르는 가마우지.

가마우지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온다.


눈부시게 하얀 외로워 보이는 백로도 한 마리 보이고

귀여운 뿔논병아리 여럿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물가에는 물이 오른 연둣빛 버드나무들이 아련한 봄빛을 내고 있다


산책길 사이사이 매화나무가 온몸에 하얀 꽃송이를 터뜨리고

요즘 잘 보이지 않는 벌들이 어디선가 몰려와 웽웽거린다.

벌들이 다녀가고 나면

터질 듯 싱싱하던 처녀 꽃들은 자태가 조금 시들해지지만

암술과 수술이 만나서 꽃은 맛있는 열매가 된다.

매화꽃에 코를 가까이하고 매화 향기를 맡는다.

그 향기를 먹고

나는 향기로운 매화꽃이 된다.


목련은 하늘을 향해 하얀 촛불 같은 꽃송이를 올린다.

봄 제단에 올리는 귀하고 엄숙한 촛불 같다.

꽃 피우는 목련이 대견해서

털이 부숭부숭한 꽃싸개를 강아지 쓰다듬듯 한참 만져보았다.

생명을 만지니 기분이 따듯해진다.


걷기를 멈추고 벤치에 앉았다.

나는 마음을 풀어헤치고 물속으로 빠져든다.

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번다한 일상이 사라지고 그윽한 평온이 찾아온다.

바람에 따라 잔잔한 물살이 무늬를 만들어낸다.

그 무늬를 그려보고 싶다.

물과 바람과 나무와 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저 평화롭다.


물은

나를 무장해제 시켜서 무의식으로 데리고 간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한참 평온하던 마음에서

문득 슬픔 한 자락이 올라온다.


가족들과 영화관 나들이를 가서

가족석에 앉아 오붓한 시간을 보내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성질 급한 아버지가

마당에 먼저 나서서

치장이 바쁜 엄마를 재촉한다.

화단에 피어있던 금목서, 치자꽃의 향기... 달콤한 무화과나무 열매.


이제는 떠나가버린 것들이 불쑥 그립고 슬프다.


슬픔은

바쁘다고 한 켠에 밀어놓은

어린 나의 마음을 녹이고 돌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슬픔이나 고통을

이제는 물을 바라보듯 편히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 가보자'고 남편에게 전화가 왔을 때,

그곳에 늙은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어린 나를,

내려 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시 만나러 올게.'


새 한 마리가 크게 하늘을 가로질러 물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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