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의 저항
일상 속 고위 관료들의 부패와 나태 속에서 신음하던 소시민들은 그들을 처벌하고 응징하는 이야기 속에서 현실에 저항한다. 못생기고 추악한 현실의 이치 속에서 우리들은 아름답고 정교한 그림과 조각으로 현실의 나 자신에게 저항한다. 통용되지 않는 야만성과 파괴적인 갈등 앞에 보편적인 구조미로 현실의 세상에 저항한다. 예술은 일상적 피로에 대한 저항이다.
이처럼 우리는 현실의 무엇인가로부터 피난하기 위해 저항을 선택해왔다. 그중 저항에 동참하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저항의 의미는 충분하다. 생산 주체에 지속적인 저항 활동의 구체적인 동력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이 현실에 저항한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을 찬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대다수 사람들의 욕망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항상 지향적 목표를 가지고 끊임없이 행동하는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대개 소수에게만 허락된 독점적 권한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목표에 쉽게 도달할 수 없다. 이 과정에 존재하는 '아름답지 못한 것', '부정하고 부패한 것',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것' 등의 장애물들로부터 피로를 느끼는 것이다. 결국 이 피로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은 현실 궤도에서 벗어나 예술이라는 저항의 공간으로 피난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직접 저항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예술을 소비하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술에도 상업적 가치가 투영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예술은 결국 소비되는 구조 속에 편입되며, 그로 인해 저항적 의미가 일부 약화되기도 한다. 고대부터 예술품은 화폐이자 교환의 주체였기에 이것들은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결국 삶에 대한 미련이 낳은 자식인 셈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저항적 예술 활동이란 무엇일까. 소비와는 관계없는 독자적인 아이디어, 이해와 타협을 배척하는 우직함.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후 평가야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고결함으로 다가온다. 오롯이 저항만을 목적으로 한 저항이다. 그렇다면 현대 예술의 모습을 바라봐 보자.
행위 예술이라는 것이 발명되며 기존의 예술과 융합한다. 예술의 창작 과정까지 작품의 일부로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을 더 나아가면 작가의 삶 자체를 예술 작품의 일부로 해석하고, 그들이 찍은 점 하나를 수십억 원에 낙찰하기도 한다. 낙찰되는 그 순간까지를 예술로 본다면 자본사회에 대한 거대한 반항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그 점 하나 찍는 것이 왜 수십억 원의 가치를 지닌 노동으로 인정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이해와 타협을 배척하는 우직함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현대 미술이란 자본사회에서 노동과 자본이 구축한 구조와 규칙들을 산산이 부수는 파괴적인 저항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근현대에 들어서 대두되었던 철학 중 하나는 구조주의 철학이다. 이 사회는 모두 거대한 구조 속에 속해 있다는 이야기이다. 나의 생각, 나의 행동, 나의 무의식마저 이 사회 속 거대한 질서 내지는 흐름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는 말이다. 나의 선택과 이성적 인간이라는 것조차 거대한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대단히 허무주의적 사고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실존을 발굴해냈다. 이런 허무주의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 말이다.
이런 허무주의로부터 저항하기 위해 우리는 구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를 해체주의라 칭한다. 해체하고 또 분해하며, 정형화되고 규칙적인 형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거대한 구조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의 저항이다. 현대 미술계는 구조주의로부터의 저항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기에 구조와 균형, 틀을 파괴한다.
이런 파괴적 저항은 인간에게 희열과 쾌감, 경외와 탄식을 선사한다. 이런 것들이 허무하고 덧없는 일상을 되풀이할 수 있는 동력이 되어준다. 이런 예술은 이해와 타협을 배척한 우직함이다. 하지만 결국 소비됨을 가정한 예술이다. 우리에게 일상적 저항을 일깨워줄 다른 형태, 소비와 관계없는 독창적 아이디어가 남아 있다.
소비와 관계없는 독창적 아이디어란 사후 평가의 고결함과도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작가의 일상생활과 관계없이 관철하려 했던 것, 결국 그의 생사와 관계없이 관철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의 예가 바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며,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사후 평가가 이루어진 경우는 아니지만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은 독창성의 고결함이 뛰어나다. 우리가 추구하던 합리적, 이성적 인간 군상에 대한 지향점을 철저하게 짓밟는다. 인간은 합리성으로만 살아가지 않으며,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비합리적 인간과도 끊임없이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는 인간 군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담겨 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예술은 자본에 침식되어 저항 정신이 아닌 상업 정신에 몰두하고 있고, 상업 정신을 기반으로 한 상업 예술은 인간 정신을 환상적 이상향에 대한 집착 성향만을 강화한다. 그러한 강화가 결국 일상적 리듬을 깨고 튀어나오는 기발하고 창의적 사고를 서서히 거세시키며, 일상적이며 평범함의 범주 안에서 가능한 구조화된 사고로 회귀하게 만든다.
사고의 틀을 깨던 현대미술도 시간이 지날수록 트렌디함이라는 이름으로 구조 속에 편입되고 있다. 예술은 시대정신을 가속화시킨다. 그렇게 팽창한 시대정신은 문화가 되며, 문화 속에서 인간사회는 팽창한다. 그렇게 팽창한 여러 문화권은 결국 충돌을 피하지 못하고 파괴와 살육이라는 거대한 재난 앞에서 시대를 재정비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화와 예술도 재정의된다.
안타깝게도 예술은 우리의 삶을 깨우는 지침이 되어줄 뿐 실질적으로 깨부수는 망치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허나 우리는 상업적 예술로부터 멀어지기를 선택할 수 있기에 우리 행위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항이란 늘 불가항력과의 대비로 나타났다. 미지의 거력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예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