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양철인간
자살 사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능동적 자살 사고와 수동적 자살 사고. 능동적 자살 사고는 자신의 힘을 들여 직접 죽음을 맞이하는 상상을 말한다. 자신을 직접적으로 해하는 모든 종류의 자살 사고가 이에 해당한다. 수동적 자살 사고는 자신이 직접 의도하지 않은 외부 사고 같은 것으로 인한 죽음을 상상하는 것을 말한다. 길 가다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 갑자기 높은 곳에서 무거운 것이 떨어지면 좋겠다 등. 이것보다 더 약한 정도지만 자살 사고와 연관된 것들은 길가의 돌이 되고 싶다, 없어져 버리고 싶다 등이 있다.
언제부터 죽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내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수동적 자살을 상상하곤 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능동적 자살을 상상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새학기가 되기 전, 누군가 나를 괴롭힐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좌절과 함께 괴로운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는 불안에 시달리는 동안 나는 정신적으로 몰아세워진 것과 같았고 굉장히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자살하는 상상을 했다. 학원에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차에 뛰어드는 상상이나 지하철 선로에 뛰어드는 상상, 상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상상이나 흉기로 목이나 가슴을 찌르는 상상 등이었다.
자기 전에 누군가 날 괴롭히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를 하다 하다 나중에는 누가 절 죽이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까지 한 적이 있다. 그 정도로 나에겐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버티는 일이었고 괴로움으로 가득한 일이었다.
성인이 되어 대학에 가서는 행복하고 안정적인 시기가 이어졌다. 법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자 누군가 날 폭력적으로 대할 가능성이 매우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편하게 말을 걸고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취업 걱정 등은 아직 먼 미래였고 나는 대학 생활을 있는 대로 즐기며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낙관 속에서 비로소 행복해졌다. 하지만 그때에도 무언가 버거운 일이 있거나 할 때는 죽고 싶다고 종종 생각했고 습관적으로도 죽는 것에 대한 상상을 했다. 당연하지만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는 여전히 깊은 곳에서 아물지 않은 채 있었고 웅웅대는 통증으로 내게 자살 욕구를 일으키고 있었다.
상담 치료는 내게 그 상처를 열어 직시하게 하는 과정이었고 매우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만큼 내게 큰 힘을 주었다. 상처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내 내면은 크게 역동했고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꿈틀대며 반응했다.
첫 상담 치료 때 학교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계획된 일을 마친 뒤 집에 돌아왔다. 하늘이 회색으로 보였고 머릿속이 안개 낀 듯 뿌얬다. 해가 서쪽에 가까웠고 방은 조금 어두웠다. 나는 소파에 기대듯 누워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몸에 힘이 없었고 정신은 지쳐 있었다. 까무룩히 누워서 방전된 듯 신음하다 에너지가 조금 찼을 때 알았다. 나는 사실 그때의 일들로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구나. 먼 옛날의 무채색 기억처럼 남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상처 조직으로 남아 아프다고 아우성 치고 있었구나. 그걸 무시한 대가가 이것이로구나.
나는 괴로울 때 내 삶을 관찰 예능 속 영상처럼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 어릴 때부터 생긴 습관이다. 괴롭힘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그때 나는 잠시 내 몸으로부터 유리되어 내 삶을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것처럼 본다. 그러면 관찰하는 나는 괴롭지 않다. 괴로워하는 나는 다른 존재니까 내가 괴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몸의 감각신경을 차단하고 남의 일처럼 내 모습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게 됐다.
집을 나서고 학교에 갈 때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괴로우면 머리에 마약주사를 놓았다. 실제로 놓는 것은 아니지만 머릿속에서 무언가 약물이 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갑자기 낙관적인 생각에 마음이 편해진다. 높은 곳에서 장대를 타는 것처럼 무언가 불안정하지만 일단 두려움이 없어지고 거짓된 희망이나마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내 몸에서 벗어나고 내게 진통제를 놓는 일을 청소년기 내내 했더니 이제는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느껴보려 해도 전혀 느낄 수가 없어져 버렸다. 나는 오랜 학대의 결과로 감각과 감정을 잃게 되었다.
실제로 나는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바로 얼굴이 붉어지거나 숨이 거칠어지거나 하지 않는다. 아주 한참 뒤에 때가 늦어서야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 나 불쾌했구나, 화가 났구나 하고 깨닫는다.
재밌는 것은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는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공감 능력자다. 정서적인 표현도 매우 강하고 자연스러운 편이다. 그런데 그건 모두 내 사회적 지능을 기반해 인지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이었다. 어릴 때는 사회적 불안이 높아 사회성이 떨어졌지만 대학에 간 뒤 본래 좋았던 사회적 지능을 토대로 사회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나는 너무 똑똑해서, 너무 잘 학습해서 나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빠르게 여러 조건을 조합해 상대의 감정을 추론하고 그에 맞는 반응을 보인다. 마치 잘 짜인 인공지능과 같다.
어릴 때 오즈의 마법사를 보며 생각했다. 양철인간은 왜 심장을 가지려고 할까? 나는 양철인간이 멍청하다 생각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침착하게 버텨낼 텐데. 나는 양철인간이 부러웠다. 가혹한 유소년기를 보내는 동안 내게 삶은 하루를 버텨내고 그 하루를 반복해 인생 마지막을 완수하는, 참고 버티는 것 그 자체였다. 내가 양철인간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살아낼’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내면을 지켜내려 한다. 미력한 어린시절의 나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결국 내 퓨즈를 끊어버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퓨즈를 끊어 감각이 차단되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아프지 않다. 기쁨도 즐거움도 알 수 없어지지만 아프지 않게 되는 것이 제1목적이므로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퓨즈를 끊고 cctv를 보듯 내 몸에서 벗어나 날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당하는 게 아닌 것처럼, 내가 괴로운 게 아닌 것처럼 여길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삶이 누구의 삶인지 알 수 없었고 내 삶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어졌다. 나는 하고 싶은 것도 욕구도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퓨즈를 끊었다는 사실도 잊고 두꺼비 집에 덩굴이 자라 보이지도 않게 되자 나는 이유 없이 공허한 사람이 되었다. 전교 1등을 했을 때, 좋은 대학에 한 번에 합격했을 때 아무것도 없었다. 보상감 없이 인간은 동기와 목적을 재구성할 능력을 잃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처음 만난 상담 선생님은 내가 참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이라 했다. 그리고 내게 있어 참는 것은 곧 무기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짚어주었다. 내 평생은 괴롭힘을 참는 것의 연속이었고 그걸 해결해준 것은 시간뿐이었다. 어떠한 것도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하므로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기만 하던 어릴 적 내 과거는 내 삶을 허무함 그 자체로 만들었다.
두 번째 만난 상담 선생님은 내가 어떻게든 시간과 시간 사이를 활동으로 채우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이라 했다. 낭비되는 시간이 하나도 없이 무언가를 하려고 부지런히 노력하다 결국 까라져 완전히 소진된 것이라 했다. 그때의 내 일과는 휴식기였음에도 굉장히 계획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간단히 아침을 먹고 수영을 다녀와 헬스장에 갔고 일을 조금 한 뒤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백수 같이 느껴져 우울해졌기 때문에 집앞 카페에 나가 책을 읽었다. 그렇게 책을 읽다 지겨워지면 늦은 오후에 집에 돌아오거나 주변 상가를 배회했다. 저녁 시간 전까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에 게임을 하거나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러다 저녁을 먹고 노동하듯 게임을 하다가 일찍 잠에 들었다.
앉거나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려고 해도 누운 채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생각들에 불안해지고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내가 감각과 감정을 차단해 사고로 그 자리를 채웠고 감각과 감정이 일어나 괴로움을 느낄 것 같으면 바로 생각으로 그 자리를 메운다고 했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채우는 것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내게 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내 내면의 발악과도 같은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뇌는 항상 공회전 중이고 몸은 휴식 없이 모든 시간을 채우기 위해 분주해졌으며 완전히 소진되어 지쳐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쉬고 싶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상담 과정 중에 감각을 일깨우는 훈련을 했다. 1차원적인 내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물을 마시고 물이 입안에서 어떻게 머무는지, 어떤 느낌을 주는지 집중하고 물을 삼킬 때 목으로 가슴으로 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느낌을 주는지 집중하는 훈련이었다. 조금 우스웠지만 놀랍게도 감각에 집중하려 할 때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것이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감정이라는 것일 거다. 인간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훈련하는 안드로이드 같이 나는 인간의 감정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선생님의 지적으로 알게 된 것이 있는데, 내가 주로 쓰는 서술어는 느끼다가 아니라 알게 됐다, 생각한다, 깨달았다 등이다. 모두 인지적인 속성의 서술어다. 나는 체언으로나 겨우 감정에 대해 언급할 뿐이었다.
그렇게 꽁꽁 싸매져 독 깊숙한 곳에 묻히고 부패한 내 감정이 주변에 오수를 흘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오염시켜 왔다. 병든 땅으로부터 자라난 것들은 내게 외친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여전히 감정이 일어날 때 내 사고가 빠르게 개입해 그것을 차단한다. 쓰지 않아 퇴화한 신체 일부처럼 내 감각과 감정은 무뎌지다 못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렸다. 다시 쓰려고 노력하며 일깨워야 원시적으로나마 발달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이 보이지 않지만 죽지 않기 위해 치료에 성실히 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