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를 보고

부위별로 조각조각 찬양받는 여성의 몸

by 해파리

데미 무어의 자서전을 보고 감독은 그가 엘리자베스의 삶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데미 무어는 질곡의 삶을 살며 젊은 시절 톱 배우였다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으며 스크린에서 밀려나 휴식기를 가질 때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했다. 많은 부분, 서브스턴스의 모든 과정은 데미 무어의 삶과 크게 닮아 있다.

영화적 설정이라 다들 대충 넘어갔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서브스턴스의 활성제와 스위치, 식사 공급은 모두 정맥 주사로 이루어진다. 단순 근육주사와 달리 정맥 주사는 훈련된 간호사나 의사가 아니면 놓을 수 없다. 일반인이 아무리 절박하고 급하다 해도 갑자기 자신의 정맥을 찾아 한 번에 주사를 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엘리자베스에게 의료적 지식이나 배경이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많은 미국의 ‘약쟁이’들은 자기들끼리 알음알음 약물을 구해 정맥 주사를 놓는다. 그리고 꽤 많은 약쟁이들은 다이어트를 위해 처방받은 마약성 약물을 복용하다가 중독되어 마약을 시작한다.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는 50살이 될 때까지 여배우로 존재하기 위해 관리하는 삶을 살았다. 영화에서는 젊음을 되찾는 활성제로 나왔지만 여성이 다이어트를 위해 마약에도 손대는 사회임을 자연스레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서브스턴스에서 나타나는 젊음과 나이 듦의 대비는 여성에게 강요되는 미의식과 함께한다. 매체에 나오는 여성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하고 탱탱한 몸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려야 한다. 미에 대한 찬양은 자연스레 어려 보이기를 강요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엘리자베스는 분명 아름답지만 ‘더 아름답지 못해서‘ 어린 여성에 대한 수요에 밀려난다. 극중에서 프랭크의 데이트 신청을 받고 소녀처럼 기뻐하면서도 막상 데이트를 나가기 전 수의 반짝이는 입술을 보고 화장을 고치다 폭주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더 아름다워질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한 여성의 좌절과 자기혐오를 보여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화장과 머리모양을 해놓고도 더 어려 보이게 머리를 묶고, 립 색을 바꾸고, 볼터치로 젊어보이는 생기를 더하려 하다 절망한다. 사회의 압력에 의한 그 분노는 응당 사회에 향해 구조를 깨는 것으로 방향이 설정되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에게 굴절되어 자기혐오로 나타난다.

매체는 이러한 왜곡된 미에의 찬미를 강화하고 확대해 사회에 설파한다. 매체는 직접적으로 어떻게 하라거나 어때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긍정적으로 ‘You got it!‘라고 시청자에게 말하지만 50대의 여성이 20대의 여성으로 밀려나는 것을 보며 시청자는 자연스레 ‘나이 든 것은 그래야 한다’라는 메세지를 주입받는 객체가 된다. 그리고 폭발적인 시청률로 보답하며 시청자 스스로 그러한 미에의 찬미를 강화하는 주체가 된다. 즉, 매체와 사회, 구성원들까지 모두 주체이자 객체로서 여성을 옭아맨다.

영화는 이러한 쇼 비즈의 행태를 고발한다. 엘리자베스는 계약에서 고정적인 쇼 자리가 약속된 바 있었지만 방송사가 계약 위반을 해가면서까지 그것을 뒤엎는다. 수의 온몸을 핥듯이 탐닉하는 카메라 워킹이 돋보이는 피트니스 쇼는 대박을 치며 여성혐오의 화신인 방송국 임원이 자신의 자리를 더 공고히 하게 한다. 시청자들은 어린 여성의 탄력적인 몸을 브라운관으로 낱낱이 살펴보며 시청률로 화답하고 여성의 몸이 어때야 한다는 인식을 주입받는다. 촬영장에서 수의 몸은 작업의 일환이라는 핑계로 민망한 자세를 프레임 단위로 해부되듯 관찰당한다. 백치의 웃음을 지니고 다이너마이트 바디를 지닌 수는 처녀성을 지니면서도 섹스 심벌로 여겨져야 하는 ‘매체 여성’ 그 자체가 되어 병든 찬미 속에 쇼를 시작한다. 이렇듯 쇼 비즈 산업 전체는 여성의 몸을 제물로 삼고 일어섰으며 여성의 몸으로 번성한다.

게다가 ‘직장 생활’ 중인 수에 대한 태도 또한 병들어있다. 카메라 오디션 때 거의 헐벗은 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최고의 근로자로 예정된다. 쇼 촬영을 하다가 중간 쉬는 시간에도 수는 헐벗어 있다. 일터에서 모든 사람이 ‘평상복’을 입고 일하는 동안 수는 가운조차 입을 수 없어 직접 가운을 요청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가운을 입은 것 또한 평상복을 입은 사이에서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모습이나 호텔 방에 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그 복장은 근로자의 것이라 볼 수 없다. 중간에 임원이 불러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수는 헐벗은 상태로 양복을 갖춰입은 임원 앞에 선다. ‘업무’를 하는 사람 대 사람이라 보기 힘든 옷차림의 차이는 성별에 따른 수직적인 위계를 상징하며 위화감 없이 녹아든다. 그 모습에 위화감이 없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한 감독이 짚어내고자 하는 부분이다.

여성의 몸은 성적 대상화의 과정 중에 부위 별로 분해된다. 프레임은 수의 몸을 부위 별로 포착해 정육점 상품처럼 제공한다. 여성의 몸이 프레임을 통해 부위 별로 분해되는 것은 여성의 몸이 물리적으로 분해되는 고어한 장면들과 동치되며 마지막 엘리자수의 모습으로 합쳐진다. 조각조각난 부위들을 모두 모아놓은 엘리자수의 모습은 매체에서 제물로 삼은 여성의 몸이자 대중들이 소비한 여성의 몸이다. 자신들이 소비하던 것을 총체적으로 모아 제공하자 관객들은 그제야 비명을 지른다. 부위 별로 소비될 때는 찬미되지만 소비된 부위를 모두 합치면 괴물이 된다. 엘리자수의 얼굴 근처에서는 유방이 탯줄을 가지고 열매처럼 열린다. 카메라 오디션에서 있던 말을 되받아쳐 '너희 말대로 코에 가슴이 열렸는데 어때?'하고 공격적으로 묻는 것 같다. 엘리자수의 모습은 성형이나 시술로 자신을 학대하다 못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여성 개인의 탓이 아니며 사회 전체가 만들어낸 것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복수하듯 피를 분수처럼 쏘아대는 장면은 관객, 즉 대중이 공범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영화는 여성의 생리를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각을 꼬집는다. 영화에서 여성이 피를 흘리는 순간은 고통과 함께 하며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니다. 정맥 주사를 놓을 때, 부작용으로 몸이 무너질 때 등 여성은 괴로운 상황에서 피를 흘린다. 하지만 수의 파트너는 수가 괴로워 하며 흘린 피를 보고 오히려 웃으며 가볍게 여긴다. 가볍게 여기다 못해 ‘정서적으로 혼란스러워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으로 취급한다. 공포스러운 목소리로 남자를 쫓아내며 영화는 여성의 피가 하나도 우스울 것 없다고, 생리는 장난이 아니라고 화답한다.

한편,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등골에도 있다. 엘리자베스가 바에서 취할 때까지 마시는 날 엘리자베스는 등을 훤히 드러낸 옷을 입고 있다. 젊은 여성을 애지중지하는 옆 자리의 모습을 보고 엘리자베스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이후 엘리자베스 몸에는 등골 흉터가 생겨 가려야만 한다. 하지만 코르셋처럼 몸을 옥죄는 등 지퍼가 등골 흉터처럼 외피를 넘어 자리한다. 지퍼가 내려갈까봐 엘리자베스는 긴장한다. 수의 악몽 속에서도 지퍼가 열리자 내장이 튀어나오는 등, 지퍼는 열려서는 안되는 무언가다. 그것은 마치 코르셋을 찬 여성이 코르셋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몸을 보이기 두려워하는 것과도 같다.

등골은 모성으로도 연결된다. 엘리자베스가 괴로워하며 수를 배출해낼 때, 그것은 마치 배 아파 자식을 낳는 것처럼 등골 아파 자신을 낳는 것으로 연출된다. 자식은 또 하나의 자신이다. 특히나 같은 성별로서 어머니와 딸은 정신적으로 더 깊이 연결된다. 어머니는 딸에게서 젊은 자신을 보며 자신의 후회와 회한을 돌이키며 통제한다. 딸은 어머니를 부정하며 어머니를 늙고 못생기고 너저분한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결국 둘은 ‘같은 유전자 하나‘를 공유하는 ’one‘이다. 어머니의 등골을 빨고 자란 딸과 자신을 착취하며 딸을 길러내는 어머니. 애증으로 뭉친 모녀 관계를 엘리자베스와 수가 보여준다. 엘리자베스가 활성화를 포기하는 순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혐오, 연민이 보이지만 어머니가 딸을 바라볼 때의 애증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아무리 끝내고자 해도 끊어낼 수 없는 천륜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피의 관으로 끈처럼 엮여있다.

영화에서 사회는 내내 여성에게 아름다울 것을 강요한다. 몸의 말단부터 분리되며 수가 당황해하는 순간 방송국 임원과 이사진은 수에게 예쁘면 다 된 거라고 말하며 웃으라 한다. 수를 바라보는 이사진은 모두 ‘늙은 백인 남자들‘이며 아름다움을 강요받은 적도, 밀려나본 적도 없이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남성들이다. 그들은 전부 하얗게 센 머리로 자신의 늙음을 가리지도 않은 채 관리되지 않은 몸을 정장으로 감싼 뒤 어린 수에게 웃으라 말한다. 수는 어깨를 훤히 드러냈지만 여성복으로서는 노출이 과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드레스를 입은 채 미소를 짓고 아무 문제 없음을 증명한다.

서브스턴스는 여성의 삶에 가해지는 미와 관련된 압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혹자는 고어물, b급 감성 연출이라 할 수 있는 부분도 사실상 여성이 정서적으로 느끼는 강도가 같다는 면에서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였던 데미 무어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자신이 한참 톱 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예쁜 것 말고는 볼 것 없는 배우‘가 될 것이라고 말한 업계 관계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영화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반짝이는 globe 안에 있던 엘리자베스는 반짝이는 globe를 든 데미 무어가 되었고 그것은 구조를 넘어선 여성의 놀라운 모험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