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킹이 전부는 아니니까
사랑스러운 리스너 되기
국어는 이해와 표현을 가르치는 실용 교과다.
듣기와 읽기는 이해의 영역이고
말하기와 쓰기는 표현의 영역으로
상호 긴밀한 영향을 끼친다.
청자, 독자, 화자, 필자(작자) 등으로
영역별 주체성을 표현한다.
수업에서 아이들은 청자와 독자의 역할을 더 잘 수행하고 화자나 필자의 역할을 맡기는 꺼려한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발표수업은
(수행평가가 아니라면)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데에
많은 장치를 필요로 한다.
그나마 대본을 작성하고 보고 말하는 것으로
발표 공포를 낮출 수 있다.
가끔은 수행평가인데도
발표 자체를 거부하는 아이들도 있다.
국어라는 과목을 단순히 네 등분으로 쪼개면 당당히 한 조각을 차지하는 말하기 영역인데,
몇 번의 권유에도 도리질을 하면
더 이상 나도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실제 친구들이나 가족들과는 말을 참 잘한다. 사적인 말하기에는
발표 공포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기 이야기를 하기에 바빠
듣는 행위를 잊는다는 데 있다.
오로지 화자로서의 역할만 있다는 듯
자기 이야기하기에만 급급하다.
잠깐 상대가 이야기하는 것도 못 듣고
말을 막아서는 모습도 보인다.
실생활에서는 수업에서 그토록 하기 싫었던 말하기와
그토록 수월했던 듣기가
이렇게 역전되는 것이다.
실제로 자기 말을 다 하기 전에는
상대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는 이를 안다.
많은 학교의 관리자들이 그러하다.
말을 주고받는 품위는 그들이 갖고 있는 직책만큼 따라오지 않는 걸까? (물론, 인품이 훌륭하신 장, 감님들도 계시다. 허나 비율로는 극히 드문 것이 사실이다.)
나는 교권침해 판정을 받고도
도리어 학부모에게 사과를 하라는
이상한 강요를 한 관리자를 경험했고,
싫다는 의사를 비추자 강력한 샤우팅을
듣게 되었다.
나의 의견이나 생각을 묻지 않고
자기만의 생각으로 나의 고유한 인격을
휴지 구기듯 밟았다.
오로지 화자로만 기능했던 그는
대화의 기본 구성요소가 화자와 청자라는 것을 알까?
나는 청자도 화자도 되지 못한 채,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그의 말(정확히 말하자면 권위의식 가득한 고성이었다.)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어렵게 입술을 떼어 말했다.
-왜 저한테 소리 지르세요?
속으로는 무척 떨렸고,
무섭기도 했지만
당당하게 말하려 애썼다.
학부모의 악성민원을 맨몸으로 맞서며
길러진 맷집이 한몫했던 것 같다.
그는 나의 이 말에
세상 가장 친절한 사람으로 돌변하여
미안하다는 말을 깃털보다 가볍게 열 번쯤 했다.
사과를 듣고 있긴 했지만
난
그 대화의
청자도 화자도 뭣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모임에서는
한 사람에게 화자의 비중이 쏠린 경우도 있었다.
어떤 목적의 모임이건 간에
내가 맡은 화자와 청자 역할 비중은 비슷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존재하기 위함이다. 아무리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듣기만 하는 것은 존재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노래방에서도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더 자주 있는 대화의 장에서
한 사람만 마이크를 잡아선 안될 일이다.
그 모임에서 나는 마이크 배분을
적절히 하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 그 모임은 서서히 자연스럽게
사라질지도 모른다.
나는 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안다.
그래서 잘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맞장구도 쳐주고, 함께 울고 웃어주기도 한다.
고민을 털어놓으면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참, 선생님한테 말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요.
-Anne, 자긴 어쩜 이렇게 사람 맘을 편하게 해 줘?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난 왜 그 생각 못 했지? 다음엔 그렇게 해볼게. 고마워.
청자로서 듣는 많은 칭찬들. 물론 좋다.
좋지만, 나에게도 사랑스러운 리스너는 필요하다. 어떤 때는 스피킹이 전부인 사람들을 만나
3시간, 4시간 동안 청자의 역할만 하다 보면
너무 지치기 때문이다.
모두가 화자이고 청자인,
사랑스러운 대화들이 오고 가는 그런 시간은 너무나도 행복하기에
다음 단원 수업에선
사랑스러운 청자 되기를 학습목표로 해야겠다.
마침 이번 단원은 '공감하며 듣기'니까.
스피킹이 전부는 아니니까.
좋은 청자가 되기 위해
공감을 연습하고, 감정 읽기를 하자.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필사를 하자.
사랑스러운 리스너 되기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