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현 님, 초음파 검사실로 들어가실게요.”
건강검진 대기실에 앉아 있던 나는 잠깐 멀뚱하게 안내 직원을 바라보았다.
내 이름을 불렀으니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얘기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들어가실게라니? 목소리 크기로 봐서 검사실 안에 있는 사람에게 내가 들어간다고 통보를 해 주는 것 같지는 않고, 자기가 들어간다는 얘기도 아닐 텐데...’
엉거주춤하게 있는 나를 보고 그 직원은 ‘왜 빨리 검사실로 들어가지 않느냐.’는 눈길을 주었다. 잠깐이나마 얼뜬 표정을 지었을 나는 바로 상황을 수습하고 검사실로 들어갔다.
이미 십 년도 훨씬 넘은 2000년대 후반 건강검진을 받으려 병원에 갔을 때 겪은 일이다. 지금은 이러한 말투가 흔해지다 못해 일반화됐지만 그때만 해도 많이 어색하게 들렸던 기억이 난다.
‘아니 왜, 검사실로 들어가세요 하면 될 것을, 저렇게 얘기할까?’
이처럼 생경한 어투의 경험은 이후 계속 이어졌다. 안내를 하는 곳이면 죄다 그런 말투로, 아닌 듯이 말하지만 실은 나에게 ‘요구’했다. 식당을 가도 그렇고 은행을 가도 그렇고 행사장을 가도 그랬다.
“이리로 오실게요, 저리로 가실게요.”, “나오실게요. 들어가실게요.”
나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는 말을 정면으로 얘기하지 않고 마치 자기가 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안내하는 사람의 말에 전에 없던 조심스러운 태도가 느껴졌지만 ‘하라는 것인지 하겠다는 것인지.’, 이상하고 어색했다.
이러한 말투의 변화는 말 그대로 전방위적인 현상인 것 같았다.
강연장에서 종종 듣는 “질문 있으실까요?”, “혹시 이러이러한 분계실까요?”와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질문이라는 단어에 직접 경어법이 사용된 것도 이상하지만 이 역시 상대를 정면으로 대하지 않고 피하는 어법이다.
“질문 있습니까?” 혹은 “질문해 주세요.”, “이러이러한 분계십니까?”로 표현하면 명확할 것을 이처럼 상대를 흐리며 두리뭉실하게 바꾸어 말한다.
그즈음 한번 고객 응대 업무를 하는 사람들과 비교적 편한 자리에서 얘기를 나눌 상황이 됐다. 대답은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고객에게 정면으로 하시오, 마시오 하기가 부담스러워서 쓰게 된다.”고 했다.
명령형에 맞게, 그러나 정중하게 “들어가세요. 자리를 옮겨 주세요.”라고 해보라 하고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다. 대부분 “불편하다."고 했다. 불편한 이유를 물었더니 “익숙하지 않아서.” 혹은 “맞대거리 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했다. 그중 한 사람의 말이 비슷한 취지였지만 인상적이었다.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라고 한 소리를 들을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요약하자면 일상화되고 있는 기이한 표현은 명령형의 말이 무례할 것 같아 정면을 피해 지시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고심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방어책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더 친절하려는 노력의 하나인 것은 분명했다.
명령형이나 지시형은 상황이 가지고 있는 일방성으로 인해 때때로 잘 쓰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 사람은 지시를 하고 다른 사람은 그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또는 점원이 고객에게 ‘명령’을 해야 하는 상황을 예의 바르게 소화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나라의 언어에 명령형을 부드럽게 하는 장치가 있는 것 아닌가 싶다.
한국말에도 경어법을 사용해 얼마든지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명령형을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라고 하면 된다.
이것조차 부담스러우면 “이렇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렇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다. 과도하지만 ”이렇게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언어 습관은, 그러나 그렇게 진화하지 않고 있다. 명령형도 아니고 독백도 아닌, 1인칭인지 2인칭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계의 표현으로 상대방에 대한 명령과 지시를 대신하고 있다. 아무리 완화시켜도 명령형의 외양을 띠는 것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런 표현이 예전부터 일상적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나의 경험으로는 2000년대 들어 어느 시기부터 간헐적으로 들리다가 최근 들어 일상적이고 지배적인 표현이 된 것 같다. 새로운 조어의 등장이 대체로 그렇듯이 개발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그러한 필요를 느낄 무렵 누군가가 쓰기 시작했고 점차 넓게 공감대가 형성되며 사회성을 획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상업적 서비스와 관련된 곳에서 주로 시작됐지만 최근에는 그와 거리가 먼 일상 대화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그들이 다른 곳에서는 고객일 것이고 또 선배이기도 하고 아랫사람이기도 할 테니 그렇게 확산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변형된 어법은 이제 자연스러운 표현 양식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렇게 쓰지 않으면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언어에는 일상의 습관과 상호관계가 투영돼 있다. 명령형 표현을 극도로 피하고 상대를 정면으로 응대하지 못하는 태도는 일상의 어떤 것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관계의 내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라면 그 시기 한국사회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지내던 시절 간혹 미국 사람을 만나면 영국인에 비해 대체로 쾌활하고 관계에 적극적인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받곤 했다. 처음에는 개인차라고 생각했는데 영국의 차분한 분위기에서는 대체로 두드러져 보였고 많은 주변의 동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대해 문화를 연구하는 한 친구의 분석은 흥미로웠다.
“어디서든 총이 등장할 수 있는 사회 조건 위에서 사람들은 서로 적의가 없다는 뜻을 처음부터 명백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상시적 총의 위기감으로 인해 그에 대한 방어기제로 사람들은 먼저 손을 내밀고 적극적으로 친밀함을 표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됐다는 것이다.
엄밀한 분석이 이루어졌고 충분하게 공감대가 형성된 이론인지는 불명확했다. 국가의 문화적 특징을 단순하고 가볍게 요약할 수는 없을 것이고 개인차도 고려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의 해석이 인상적이었고 충분히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에 위험이 상존한다면 거기에 속한 사람들은 분명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특별한’ 태도를 형성할 것이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회와 다르게 보이는, 해당 사회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한국의 대화법에서 명령형이 사라지고 상대에게 정면으로 지시하지 못하는 현상을 보면서 과도할지 몰라도 ‘총이 있는 미국’에 대한 생각이 연결되곤 한다. 2000년대 어느 시기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라면 한국의 전통적인 위계나 오래된 가부장질서와 직접적 관련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관련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배경으로 작용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 위에 무엇인가 새롭게 등장한 요소가 이 기이한 어법을 추동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갈등의 고조, 양극화, 거세지는 압박, 헬조선, 상호 간의 충돌 가능성?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한국인들은 과거와 다른 종류로 지금 많이 힘들고 아픈 것이 분명하다. 자연스러운 언어 습관이 비틀어지고 기이한 어법이 나올 만큼 일상의 긴장과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웃는 것이 웃는 게 아닌 것이다. 과도하게 웃다가 갑자기 울기도 한다.
‘명령’ 해야 할 때 명령하지 못하는 현상에서 우리는 임계점으로 다가가는 사회적 위험을 감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