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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현 Nov 11. 2024

더 친절했어야 했던 일

“00역으로 몇 번 버스가 가나요?”

“00번이 갑니다.”

장을 보고 돌아가는지 양손에 검은 비닐봉지 몇 개씩을 든 노부부에게 나는 짧게 대답했다. 

마침 나의 행선지와 같아서 바로 얘기해 줄 수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버스는 내가 알려 준 번호 외에 다른 것도 있었다. 그곳에서 버스를 자주 타지 않는 나는 다른 버스 번호를 외고 있지 못해서 그렇게만 말했다. 내가 타는 버스가 비교적 자주 오는 편이기도 했고 더 이상 찾아보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아서도 그렇게 했다. 

“저와 같이 타면 됩니다.”라는 말만 이었어도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곳은 두 방향에서 오는 노선이 합해지는 정류소여서 버스들이 많았다. 버스 정류소의 노선 안내판을 잠깐만 보았다면 다른 버스 번호도 알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정류소에 있는 사람들 중 말을 붙이기가 가장 수월해 보였던지 조금 후에 그들은 다시 나에게 물었다. 

“그 버스를 타려면 어떤 교통카드를 써야 하나요? 이걸로 쓰면 되나요?”

카드 하나를 들고 보여주며 물었지만 나는 그 카드가 단순 교통카드인지 신용카드인지 확인하지 않고 대답했다. 

“보통 신용카드면 될 겁니다.”

신용카드라고 해도 교통카드 기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지만 그들이 내민 카드를 자세하게 보지 않았다. 설혹 보았다한들 내가 그것을 구분할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더 묻지도 않았다. 일반적으로 신용카드에 교통카드 기능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고 나 역시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전제하고 최소한으로 대답한 것이다. 

나도 충분한 대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노부부 역시 무엇인가 미진한 듯 더 얘기를 걸고 싶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들의 시늉을 얼핏 눈치채면서도 대답과 함께 정류장에 들어오고 있는 버스로 눈길을 돌렸다. 더 이상의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를 그렇게 했다. 그들은 나에게 보냈던 시선을 어색하게 거두며 서로의 눈짓으로 궁금증을 무마해 버리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렇게까지 노부부에게 냉정하게 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약간 피곤했던 상황, 스산한 날씨, 혼잡스러운 정류소 앞의 분위기 등등이 작용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이 왜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굳이 더 얘기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 같다. 


마침 내가 탈 버스가 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저 버스를 타면 됩니다.”라고 말을 하고 그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나는 버스에 먼저 올라탔다. 버스에 앉아서 뒤늦게 노부부가 타는 것을 보았다. 짐을 들은 그들은 일단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부인이 조금 전 나에게 보여준 카드를 들고 출입문 쪽으로 다시 가서 버스요금을 지불했다. 운전기사에게 물어본 후 2명 분을 함께 계산하는 것 같았다. 버스 앞문 감지기에서 ‘삑-’ 소리가 들렸다. 결제는 제대로 된 것이었다. 나의 안내가 통한 것은 아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일인용 좌석의 앞뒤로 앉은 그들은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잠깐씩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목적지에 가는 버스에 옳게 탔고 걱정하던 버스 요금도 제대로 지불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모습은 그것이 그들에게 그만큼 부담스러웠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뒤늦게 후회가 일어났다.

‘버스를 기다리며, 또 버스를 타고 요금이 맞게 지불될 때까지 그들은 얼마나 걱정스럽고 불안했을까?’ 

버스 타기 전 내가 단답형으로 끊어서 대답을 할 때 그들의 얼굴에 엷게 스쳐 지나가던 난감함이 확대돼 떠올랐다. 

‘왜 그렇게 밖에 못했을까?’

노부부의 다행스러워하는 표정이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에게는 표창처럼 날아들었다. 결과가 같아졌을지라도 현재의 지금과 나의 도움이 조금 더 적절해서 그들이 불안하지 않게 맞았을 ‘지금’은 사뭇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해결됐지만 이미 쌓여 버린 과거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안했다. 그러나 장면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고 나는 그 마음을 표시할 방법이 없었다. 


버스는 친절하게도 내리는 정류소의 이름을 소리로 들려주었고 정면의 액정판에 지속적으로 띄어 주기도 했다. 그것도 해당 정류소에서 다음 정류소 이름을 예고해 주기까지 한다. 노부부가 충분히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처음 탄 사람이라고 해도 조금만 신경을 쓰고 있으면 내릴 정류장을 놓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완벽한 안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선지가 다가오자 나는 조금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못 무뚝뚝한 척 말했다.

“이번 정류소에서 내리면 됩니다.”

버스 타기 전의 친절하지 않았던 태도가 마치 나의 보통 모습인양, 나의 마음은 태도와는 다르다는 듯, 당신들을 계속 배려하고 있지 않느냐는 듯, 표정으로 변명을 했다. 

사실 나는 해도, 안 해도 별 상관없는 안내를 한 것이었다. 그들 역시 내릴 차비를 하고 있었던 터에 나의 간섭이 그리 요긴했을 리는 없다. 나는 뒤늦게 어색한 과잉친절을 베푼 것이었다. 그러나 노부부는 내게 “고맙다.”며 연신 사례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알고 있는 얘기를 들어줘야 하는 바람에 짐을 챙겨서 내려야 하는 그들이 공연히 분주해진 것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 정도였다. 

여하튼 나도 내리고 그들도 무사하게 내렸다. 전철을 탈 예정인 그들과 나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야 했다. 나는 눈에 보이는 전철역을 굳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 후 그들이 돌아서서 가는 것을 본 연후에 나의 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알아서 갈 수 있는 길을 눈앞에 두고 불필요하게 나의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에게 반복해서 고맙다는 표시를 했다. 

나는 불편했던 내 마음을 그렇게 세탁했다. 


며칠 전 공교롭게 같은 장소, 같은 버스에서 내가 한 짓과는 정반대의 장면을 목격했다. 참 공교로운 일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너의 며칠 전 행동과 비교해 보라.’고 나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그날 그들이 버스를 타기 전에 어떤 상황이 전개됐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날따라 나는 몇 정류장 전에 이미 버스를 탄 상태였고 그들은 마침 그 노부부와 나 사이에 사연이 있었던 정류소에서 타고 있었다. 

초로의 부인네가 먼저 타는데 바로 뒤따라 타는 젊은 여성이 어서 올라가라며 거들었다. 사람들이 보통 타는 것보다는 소란스러운 편이어서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잠깐 그리로 쏠렸다. 나의 시선도 그중 하나였다. 버스 요금은 뒤따라 타는 젊은 여성이 2 명분을 지불했다. 

조카가 이모 정도 되는 사람을 ‘모시고’ 나온 것이려니 했다. 그러나 드문드문 들리는 이야기 소리로 보면 그들은 이전부터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젊은 여성은 버스의 노선이며, 타고 내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 같았다. 

대중교통의 이용에 대해 저렇게 모르고 어떻게 나왔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 역시 낯선 곳에서 난감한 처지에 놓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익숙지 않은 지방에 갔을 때 카드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몇 번 버스를 타야 할지 몰라 당황했던 상황이 나에게도 있었다. 

초로의 부인네는 감사의 표시를 하며 듣고 있었다. 그는 몇 정류장을 간 후 먼저 내렸다. 함께 내리지 않은 젊은 여성은 따라 일어나 카드를 감지기에 댄 후 초로의 부인네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와서 앉았다. 젊은 여성의 등 뒤는 단지 다소곳했다.

한가했던 버스 안은 부인네가 내리는 동안 잠시 움직임이 있다가 조용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내막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상황은 복잡하지 않았고 매우 자연스러웠다. 여느 정류소에서 그렇듯 한 두 명이 내렸을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버스는 태연하게 덜컥거리며 다음 정류소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버스 안이 훈훈해지는 것을 나는 느꼈다. 

승객들의 가슴에 잔잔한 소용돌이가 이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거칠어지는 세상 한편에 그래도 피어오르는 온기를 나는 보았다. 

그 움직임은 수선스럽지 않았지만 조용하게 강했다. 


세탁된 줄 알았던 나의 마음에 후회의 역풍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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