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문자폭탄과 의사소통의 품격

by 이종현


이 글은 2017년 중반 정도에 썼습니다. 문자폭탄이라는 말이 그즈음에 새롭게 등장했고 폭력적 의사소통 방식이 사회적 논란으로 크게 부각되던 시기였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까 그 당시의 걱정은 지금에 비하면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소박하고 낭만적인 감정이었다는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8년이 채 안된 세월 동안 우리 사회의 소통 방식과 내용이 얼마나 왜곡되고 악화됐는지 절감하게 됩니다. 거짓말이 난무하고 폭력적 대화가 횡횡하는 우리 사회가 이 갈등을 얼마나 견디어 낼지 걱정이 됩니다. 한국사회는 지금 그만큼 빠르게, 그리고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생활필수품이 되면서 한국 사회의 의사소통 방식도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할 때 이메일이 기존의 편지를 대체하던 과정은 다소 생경하고 거북했다. 유장한 사연에 두텁게 흐르던 감성은 쏙 빠지고 차가운 유리 화면 위에 덩그러니 문장 몇 개 놓인 것이 이메일이었다.

사물과 시간을 관통하는 기계적 효율성을 얻은 대신 더딘 편지가 몰고 오는 감동의 파도는 잃어버렸다. 그래도 이메일에는 건조하지만 사연이 있었다. 편지 같은 행간의 은유로 가슴이 울렁이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사연의 표면에 사람의 향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되면서 이메일조차 효율성의 자리를 문자에 내주었다. 보내고 받는 반응의 효율성에서 이메일과 문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생경했던 이메일의 기억이 향수처럼 아련해질 지경이 됐다. 빛의 속도만큼 가벼운 문자에 사연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사연은커녕 최소한의 맥락조차 사라지고 일방적 메시지만 난무하게 됐다.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강퍅한 메시지에 감동이 스밀 여지는 더더욱 없다. 비가역적으로 진행되는 기술의 발전이 소통의 형식을 바꾸었고 변화된 소통 방식은 관계의 내용과 질을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은 쏠림 현상과 과도한 자기 확신을 조장하는 특징을 가진 것으로 많은 미디어 연구들은 분석하고 있다. 문자 폭탄은 그 정점에 있다. 이른바 악플의 모바일형 진화물로 나타난 문자폭탄은 규모와 속도의 측면에서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누구나 어디서나 언제든지, 단지 몇 글자로 보낼 수 있는 문자는 한 마디의 항의와 비난에 아주 걸맞은 소통양식이다.

다수 대중의 결집된 의지는 강력하다. 문자폭탄의 대상은 마치 폭탄을 맞은 것 같은 공포에 빠져 들 수 있다. 익명의 다수가 쏟아붓는 저주의 메시지는 개인의 영혼을 파괴할 수도 있다. 악플이 몇몇 유명인의 목숨을 앗아간 사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공포의 메시지는 빈도가 많아질수록 기하급수적 누적 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마디씩 거든 문자는 모여서 폭탄이 되고 한 개인의 몸과 마음을 산산조각 내는 살상 파편이 되는 것이다.


더욱 심각해지는 것은 이러한 소통방식이 일상적 문화로 자리를 잡게 된다는 점이다. 기술적 진보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중립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모바일과 문자의 기술은 어느 한쪽만 전용할 수 있는 특허가 아니다. 그 경계선이 단지 감정적 호 불호이든, 정파적 입장이든, 혹은 친소관계의 정도에 따른 구분이든 한쪽이 폭탄을 사용하면 다른 쪽도 그에 상응하는 무기를 동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은 차이는 큰 차이가 되고야 말고 공감의 공간은 사라지게 된다. 상대의 과도한 공격은 받아들일만하던 일조차 거부와 맞대응으로 가게 한다. 대부분의 일에 전부 아니면 전무의 법칙이 적용되고 상대방들은 서로 공격의 정당성만 확신하게 된다. 어떤 성격의 경계선이든 진영이 나뉘게 되면 사방에서 폭탄이 터지는 일이 빈발하게 된다. 이는 갈등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무너지는 사회의 전형적 모습이다.


소통 방식은 한 사회의 품격을 대변한다. 걸핏하면 삿대질하고 주먹질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회가 있고 신실하고 합리적인 대화로 상대방과 마주하는 사회도 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의사가 전달되는 사회가 있고 표정과 약간의 기색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을 배려하는 사회가 있다.

한국의 역동적 현대사와 숨차게 달려온 기술진보가 격렬한 문자폭탄을 탄생시킨 정서적 자양분이 된 것 같다. 오랜 억압의 기억과 몰상식의 시대가 문자 폭탄의 구조적 정당성을 받쳐주는 요소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문자에 절제와 해학을 담으면 어떨까? 절제에도 그 안간힘에 따라서 하늘을 찌르는 분노가 담길 수 있고 해학도 그 비트는 정도에 따라 경고의 무게가 달라질 수 있다. 폭탄이 터지는 와중에 문자를 계기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는 미담도 적지 않게 들린다. 그래서 기술의 진보와 함께 대중의 참여가 민주주의를 신장시키게 될 것이란 낙관론을 제기하는 쪽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기술의 진보는 중립적일 수 있다. 기술이 '폭탄' 친화적 성격만을 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건조한 문자가 한 잎씩 모여 소담한 꽃송이를 피우기도 한다. 대립도, 갈등도 풍성한 대화의 꽃으로 만개했으면 좋겠다.


타협의 시대라고 한다. 공존의 시대라고도 한다. 다른 의견과 다른 세력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통의 품격은 자신을 위해서 좋다. 서로 폭탄을 들고 경계하는 사회보다는 평화스러운 소통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회가 서로에게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구강근육이 이완돼 그렇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