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을 꿈꾸다 '삑사리' 난 써니의 방

서로 다른 방 - 네 개의 세계

by 조선희

처음엔,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갸웃하게 될 만큼 ‘반전 있는 공간’을 꿈꿨다. 하지만 주어진 면적이 너무 좁아 입체적인 공간 구성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인테리어 기준을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儉而不陋 華而不侈’로 정했다. 지금의 내 공간은 이 기준에 따라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다.


내 개인 공간은 1, 2층을 합쳐 16평 정도. 1층에는 내 주요 생활공간인 침실과 거실, 욕실이 있고, 2층에는 아이들이 오면 머무는 방이 있다. 미로헌 입주 직전 집은 지금보다는 넓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작고 단정한 이 공간이 마음에 든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일상에서 움직이는 반경만큼만 공간을 차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미로헌은 내가 늙어갈 집이다. 욕심낼 이유도 없고, 욕심부릴 여유도 없다. 긴요하지도 않은 공간을 꾸미느라 돈 쓰고, 관리하고,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건 결국 내게도,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도 민폐일 뿐이다. 그래도 한 가지 욕망은 있었다. 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과는 정반대로 하고 싶은 마음. 이를테면 이런 것들.

• 벽은 따뜻한 느낌의 화이트 페인트로, 침실 한 면은 과감한 포인트 컬러로!

• 화장실과 욕실은 구석에 처박지 말고 볕 드는 곳으로 꺼내기.

• 변기, 세면대, 샤워기가 함께 있을 필요 있나? 다 분리하기.

• 거울 일체형 욕실 수납장은 이제 그만! 거울과 수납 분리해!

• 샤워실 외에는 다 건식으로.

• 노천탕 분위기 나는 조적욕조를 부탁해!

• 욕실 마감은 온통 블랙으로, 포인트 타일은 밝고 화사하게!

• 세면대 높이, 내 키에 맞춰! 지금까지 충분히 불편했다 아이가!

• 컬러 스위치도 한 번 써보자. 비싸더라도!

• 평범한 다운라이트 조명은 가라, 매립등과 레일 스폿조명으로 노안 챙기기

• 미닫이 문, 한 번도 써본 적 없으니 이번엔 꼭!

• 침실 문 하나쯤은 히든 도어로, 쥐도 새도 모르게 감춰보기

• 내 집이어도 벽에 못 박기는 그만, 그림 걸 레일을 깔아줘!

• 창문은 꼭 있어야 하나? 쓸 일 없으면 안 만들거나 높고 작게.

• 원목 마루는 광폭으로! 맨발로 밟는 감촉, 너무 소중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익숙함에서 제대로 벗어나 보고 싶었다. 어린 시절은 부모님이 고른 집, 결혼 후 전셋집은 집주인의 취향이 반영된 집, 그 후에도 시공사가 짓고, 나는 단지 들어가 살기만 했던 집. 내 나이 육십. 이제는 그런 집들과 ‘헤어질 결심’을 할 타이밍이 온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 집’ 짓기의 정석이자 묘미 아니겠는가. 심지어 같이 살 사람들도 내가 선택한 마당에 집을 내가 원하는 대로 못 지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진짜 내가 원하던 집이 되었느냐고? 설계를 앞두고 내가 적어둔 개인 공간 위시 리스트를 기준 삼아 이행률을 따지자면, 대체로 만족스럽다. 현실적 제약 탓에 실현하지 못한 것들도 있지만, 건축사들이 정말 세 심하게 도와주었다.


우선 ‘분리주의’에 성공했다. 협소한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변기, 세면대, 샤워기, 욕조를 모두 공간 분리해서 일렬 배치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집들에서는 화장실, 욕실이 거의 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창문이 없어 불만스러웠는데 이번에는 남향인 거실과 나란히 배치해서 ‘양지’를 찾아주었다. 마음먹은 대로 거울과 수납장도 분리했다. 노천탕까지는 무리였지만, 속마당을 바라보며 몸을 담글 수 있는 조적 욕조를 만들었다. 나만의 소박한 사치이자, 내 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욕실에 드디어 ‘휴먼 스케일’을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엄청 불편했으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 바로 내 키에 맞지 않은 세면대 높이였다. 여긴 내 집이다. 매번 옷 앞섶이 젖는 기성 세면대는 이제 그만! 내 키에 꼭 맞춘 맞춤형 세면대를 드디어 장만했다. 나만의 세면대라니, 감개무량했다.


거실엔 한지 포켓 도어를 달았다. 속마당의 툇마루와 제법 잘 어우러진다. 전통미와 실용성을 한 번에 해결한 위시 리스트 아이템이다. 스위치와 콘센트는 ‘반전 포인트’로 삼고 싶었던 아이템인데, 비누와 마루 덕분에 가능했다. 독일제라 국내 구입가는 터무니없이 비쌌고, 직접 구매하자니 주문서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결국 비누와 마루가 인터넷 구매 대행과 설치 솔루션을 해결해 준 덕분에 빨강, 초록, 노랑 컬러 스위치를 설치할 수 있었다.


이건 정말 나 혼자였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다. 지금도 그 색감의 조합을 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다. 특히 고추냉이 색깔이 섞인 노란색 스위치는 ‘딥 그린’ 컬러로 벽을 칠한 침대 머리맡에 달았다. 색감이 딱 들어맞는 ‘1+1’ 포인트가 되었다.



당연히 아쉬움도 있다. 거실을 손바닥만 한 갤러리처럼 만들고 싶었는데, 세 군데나 '삑사리'가 생기고 말았다. 하나, 가장 중심이 되는 벽에 벽걸이 에어컨이 떡하니 자리 잡으면서 그림 걸 자리를 앗아갔다. 둘, 히든 도어로 부탁했던 침실 문이 누가 봐도 “여기 문 있어요!” 하고 외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셋, 가구 배치를 염두에 두고 거실 창틀과 나란한 방향으로 깔아 달라고 누차 부탁했건만 결과는 수직 방향으로 깔린 원목 마루. 사소해 보이지만 전체 공간의 세련 미와 완성도를 해치는 오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흡하나마 내 취향이 담긴 이만한 공간을 갖게 된 건 참으로 기쁜 일이다. 처음엔 ‘내가 더 경제적으로 여유 있었더라면’, ‘아프지 않고 시공 단계에서 더욱 열정적으로 뒷심을 발휘했더라면’ 등등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이나마라도 미로허니들의 도움 덕에 가능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집에서 내가 새로운 식구들과 합을 맞추며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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