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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밤/아침의 피아노

죽음이 드리운 일상

by 김오 작가

푸른밤

존 디디온


잠시 수필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강의에서 말하는 좋은 수필이란 허구가 아닌 상상력을 동원해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치밀한 사유를 통해 고유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며, 문장은 정확하고 일관성이 있어 미적 감동을 주어야 한단다(아~ 길다). 푸른밤은 이러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흔히 트라우마라고 불리는 외상에는 성폭력, 가정폭력 같은 직접적인 외상이 있고, 상실로 인한 외상도 있다. 남편, 아버지, 어머니, 자식 등의 주요한 주변인들의 죽음으로 인한 정서적 고통. 이 책의 저자는 아이의 죽음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연결하여 이야기한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메몰 되지 않고,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치밀한 사유를 통해 세밀하게 묘사하고 비유를 통해 나타낸 글이다(친자식 남의 자식은 따지지 말자).


문장력도 일관성 있고, 보기에도 지나치지 않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정확하게 구성된 플롯보다는 푸른밤과 연결되어 있는 먹먹함, 가라앉음이 스며들어 있는 표현, 그리고 죽음, 상실의 심연에 대한 조용하지만 깊은 이야기가 있다.


뚱딴지같이 들리기도 하겠다만, 푸른밤은 자식을 읽은 슬픔에 대해 쓴 글이지만, 죽은 자식에 초점을 맞추어서 쓴 글은 아니다. 작가 본인의 생활에 맞추어서 쓴 글이다. 자신이 하는 일, 생활, 가족의 이야기가 주요하다. 그 와중에 필요하다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넣는 정도이다. 글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들도 아이를 잃은 슬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보다는 가족이 없는 자신에 맞추어져 있다. 이제 굽 있는 구두조차 신지 못하게 된 죽음의 길로 접어든 여성이 있다. 읽고 나서 느껴지는 이 상실감은 젊음과 맞닿아 있다.


처음 이 책을 집어 들기까지는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저자의 다른 책 [상실]을 읽고 싶었는데, 이리저리 뒤져보아도 구할 수가 없었다. 푸른밤은 아이를 잃은 엄마의 이야기여서 선뜻 집어 들 수가 없었다. 나는 평소 자식이 아프다는 둥, 자식이 어떻게 됐다는 식의 글을 멀리한다. 이런 글을 접하면 나는 바람소리를 낸다. 마치 내 자식을 해하는 것은 모두 바람으로 밀어버리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떤 것을 동원해서라도(그것이 미신일지라도) 내 자식의 털끝에도 나쁜 기운이 오지 못하게 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다.


실제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야 말로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뱀을 보고 무서워하여 느끼는 공포 phobia는 뱀을 없애거나 피하는 방식으로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하지 않은 채 둥둥 떠다니며 만연해 있는 두려움 fear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것에 의미부여를 크게 하고 상상의 연결고리는 만든다는 것. 그것이 사람을 정녕 힘들게 한다. [기억은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런 것들이다]가 되는 것은 이러한 면도 한몫한다.


[이제 나는 그 아이에 대해 생각할 수는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의 이름을 듣고서 울지 않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우리가 중환자실을 나온 뒤 그 아이를 영안실로 이송하기 위해 운반 담당을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아이가 곁에 필요하다]

특히 이런 일들은 상상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라고 치부해야 내가 살 수 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내가 느끼는 불안은 지나치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치지 않게 오롯이 있다.

[보호할 수 없는 것을 보호하겠노라 맹세하는 수수께끼를 말하는 것일까? 부모가 된다는 것의 그 모든 불가해한 비밀을 말하는 것일까?

시간은 흘러간다.

그렇다. 동의한다. 진부한 이야기 아닌가. 물론 시간은 흘러간다.

그런데 왜 나는 이 말을, 그것도 반복하여, 하는 것일까?]


아이가 죽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이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 마음이 아프다.라는 식의 사실적인 글을 벗어나, 글을 읽고 느끼는 감정은 배가 되게 호흡하게 하는 형식의 글쓰기. 물론, [그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나는 한 번도 두렵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는 직설적인 표현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어떤 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 시와 수필의 중간 정도에서 기술하고 있는 듯한 기법에 마음이 더 먹먹해졌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이 아이를 시간의 연속선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나를 만들기도 한다.


[깊음과 얕음, 급격한 변화.

그 아이는 이미 한 개인이었다. 나는 그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내가 다 알아야 그 아이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아이가 한 개인으로,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밀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나도 늙겠지. 5cm 굽이 있는 구두를 신었다가 삐끗하는 날에는 내 인생도 나갈 그런 날이 오겠지. 나의 죽음에 당신이 W.H. 오든의 <슬픈 장례식>의 열여섯 줄을 낭송한다면, 좋겠다.

[시계를 멈추고 전화도 끊어라

군침 도는 뼈로 개들의 울부짖음도 막아라

피아노도 치지 말고 북소리도 죽여라

관을 꺼내고 조문객을 오게 하라.

신음소리를 내는 비행기들을 머리 위에서 빙빙 돌게 하라

메시지를 하늘에 휘갈겨 쓰며 그는 죽었다고

공용 비둘기들의 흰 목둘레에 크레이프 나비넥타이를 달아라

교통순경은 검은 무명 장갑을 끼게 하라

그는 나의 북쪽이며, 나의 남쪽, 나의 동쪽과 서쪽이었고

나의 일하는 주중이었으며 내 휴식의 일요일이었고

나의 정오, 나의 한밤중, 나의 이야기, 나의 노래였다

나는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다. 나는 틀렸다

이제 별들은 필요 없다. 다 꺼버려라

달을 싸서 치우고 해를 철거하라

바다의 물을 쏟아 버리고 나무를 썰어버려라

이제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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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피아노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죽음에 관한 글을 일부러 피한다. 피하다가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를 통하고, 존 디디온의 푸른밤을 통하면서 나의 빗장도 무뎌지지는 않았지만, 무너졌다.


[TV를 본다. 모두들 모든 것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한 철을 살면서도 풀들은 이토록 성실하고 완벽하게 삶을 산다.


나의 기쁨들은 모두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나. 불안이 심해진다. 자꾸 놀라고 쓸데없는 일들에 생각을 빼앗긴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낙담스럽다. 그래도 결국 지나갈 거라는 걸 안다. 조용한 날들이 돌아올 거라는 걸 안다. 우리가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그때 우리를 구출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우리가 그토록 찾았던 그 문을 우리는 우연히 두드리게 되고 그러면 마침내 문이 열리는 것이다.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뒤적인다. 부끄럽고 괴롭다. 그의 고통들은 모두가 마망 때문이다. 마망의 상실 때문이다. 그의 고통들은 타자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인가. 그건 오로지 나 때문이다. 나는 나만을 근심하고 걱정한다. 그 어리석은 이기성이 나를 둘러싼 사랑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사실 나는 바르트보다 지극히 행복한 처지다. 그는 사랑의 대상을 이미 상실했다. 그러나 내게 사랑의 대상들은 생생하게 현존한다. 나는 그들을 그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만 하면 된다.


며칠째 계속되는 하강. 그러나 생은 쌍곡선 운동이다. 어딘가에서 하강할 때 또 어딘가에서는 상승한다. 변곡점이 곧 다가오리라. 거기서 나는 새의 날개가 되어 기쁨의 바람을 타고 떠오를 것이다.


차 안에 문득 음악이 흐른다. 부드럽고 친절한 선율. 부드러운 건 힘이 세고 힘이 센 것은 부드럽다. 그 부드러움을 잃으면 안 된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나는 나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 괜찮아. 미워하면서도 사실은 깊이 사랑했던 세상에 대해서 나만이 쓸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써야 하지 않을까.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타자를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병중의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이 기록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도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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