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찰스는 은퇴한 대학 교수이며, 알츠하이머를 앓은 부인과 사별했다. 그의 삶에는 아직 아내의 빈자리가 크다. 하나뿐인 딸 에밀리와의 사이도 서먹하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고, 새로운 취미도 가져보라고 에밀리는 찰스에게 말한다. 찰스에게 눈이 띈 것은 동호회가 아닌 노인 탐정을 찾는다는 신문 구인 광고였다. 수많은 지원자 중 유일하게 아이폰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란 이유로 찰스는 사립 탐정 에밀리에게 고용되어, 샌프란시스코 실버타운에 스파이로 잠입하게 된다. 찰스가 맡은 임무는 실버타운 사람들의 일거일수투족을 관찰하여, 실버타운의 귀금속을 훔쳐가는 절도범을 잡는 것이다.
추리물의 성격을 가진 스파이가 된 남자는 신선함으로 차별화를 꾀한다. 주인공 찰스는 수사 및 범죄에 일말의 접점이 없는 사람이다. 열정이 유일한 무기인 찰스는 스파이라는 직무에 서투른 모습을 보인다. 줄리가 제공한, 잠입 수사를 돕는 최첨단 장치를 다루는 데 서툴러하고, 매일의 수사 기록을 보내야 하는 녹음에 오늘의 날씨와 뉴스 같은 잡담을 늘어놓고, 잠재적 용의자로 거리를 두어야 할 사람들과 스몰토크를 하면서 유대감을 쌓아 나간다. 찰스의 허술함은 관객을 마음 졸이게 만들거나 짜증이 치솟게 만들기는커녕, 지극히 인간적이며 귀여운 면모를 통해 극에 유쾌하고 따뜻한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찰스는 초반에 실수도 하고 작은 사고도 치지만, 반부에 갈수록 관찰력과 통찰력을 발휘하여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인물로 성장해 나간다. 이러한 찰스의 적응기 및 활약상은 관객이 스토리에 몰입하고 찰스를 응원하게 만든다.
스파이가 된 남자는 추리물의 기본 문법을 넘어서 ‘나이 듦’과 ‘노년기’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다. 추리물의 탈을 쓴 휴먼드라마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극의 배경은 실버타운이고, 찰스가 만나는 사람들은 이곳의 직원 및 입주민이다. 먼저 시리즈는 실버타운의 운영 방식과 구조를 공들여 설명한다. 입주민의 건강상태를 관리하는 간호사, 문화 및 여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강사,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 등 직원들이 하는 일이 비중 있게 소개된다. 특히 강조되는 것은 실버타운총괄 책임자인 디디의 이야기다. 디디는 실버타운에서 발생하는 온갖 문제, 이를테면 와이파이 고장 문제, 소금통 부족 문제, 입주민 컴플레인, 시설 안전 문제를 책임감 있게 해결해 나간다. 시리즈는 실버타운 직원들의 노력 및 그들이 부딪히는 현실적 어려움을 다룸으로써 관객들이 실버타운 역시 하나의 체계적인 커뮤니티이자 많은 인력 및 지원이 필요한 공간임을 깨닫도록 만든다. 실버타운이라는 장소를 추리극의 배경으로 도구화하는 대신, 실버타운으로 관객들을 직접 초대하고 그 공간의 삶을 관객들이 체험하도록 만든다.
노년기를 보내는 인물들은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며, 시리즈는 이들이 형성하는 관계 및 공동체를 다룬다. 새로운 입주민 찰스의 적응을 돕는 버지니아와 스튜어트는 둘도 없는 단짝이다. 같이 쇼핑을 하거나 칵테일을 마시며 소소한 행복을 쌓고, 이혼 및 사별로 인한 서로의 아픔을 위로한다. 두 인물의 진한 우정은 대안 가족의 형태를 띤다. 찰스를 실버타운 부대표로 추천하는 수전은 자발적으로 실버타운에 관한 온갖 보고서를 꼼꼼히 검토하는 인물로, 입주민 회의를 통해 의견 수렴 및 문제 개선에 열정을 보인다. 각 인물들은 문학, 그림, 운동, 게임 등 자신만의 소소한 행복을 즐기며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버지니아와 앨리엇의 재결합 결혼식, 찰스를 위한 환영 파티, 스튜어트의 장례식 등 모두의 참여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오면, 기꺼이 나서서 힘을 모은다. 이 시리즈는 노인 캐릭터를 단순화하거나 일반화하는 대신, 군상극의 형태를 통해 각 인물의 이야기를 세심하게 풀어내며, 사랑, 우정, 연대 등 관계의 역학을 탐구한다. 노인 캐릭터의 삶과 감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이 시리즈의 강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리즈는 노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신체적, 심리적 어려움도 깊이 있게 탐구한다. 평생의 위시리스트였던 안마기를 고심 끝에 산 스튜어트는 하루 뒤 건강 악화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전직 의상 디자이너로서 입주민이 필요한 옷과 장신구를 멋지게 만들었던 글래디스는 알츠하이머 증세가 악화되어 결국 기억 치료 센터로 격리된 다음 집중 치료를 받는다. 매사 자신감이 넘쳤던 앨리엇은 암이 재발했다는 진단을 받고 실의에 빠진다. 헬렌은 입주민 모두가 기피하는 사나운 성격의 소유자지만, 실은 실버타운을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자식의 무관심으로 상처받은 상태다. 부인과 사별한 갤버트는 실버타운에서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외로워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시리즈는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이 마주하는 어려움인 노화, 상실, 단절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때로 슬프고 억울해도 끝내 자신의 몸은 이전처럼 건강하지 못하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은 갈수록 더 많이 떠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인물의 모습을 통해 시리즈는 관객들이 노인의 심정에 공감하고, 노년기의 어려움을 생각해 보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의 성취는 단순히 노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이 듦에 공동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이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내와 사별했던 주인공은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입주민 글래디스를 방치하지 않는다. 글래디스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찾아가 대화를 나누며, 이별의 순간에는 아내 매러디스가 생전에 좋아했던 강아지 인형을 선물한다. 이는 비록 사별한 아내의 소중한 유품일지라도 글래디스에게 더 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라 판단한 찰스의 따뜻한 배려의 결과다.
두 번째는 대화를 위한 노력이다. 극 초반 찰스와 그의 딸 에밀리의 관계는 서먹했다. 하지만 관계 회복의 필요성을 찰스가 깨달은 이후 극 말미에 둘은 오랜 시간 외면해 왔던 빅토리아의 죽음을 마주하고 서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빅토리아의 유품을 함께 정리하고, 아들 셋을 둔 에밀리와 함께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둘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한층 가까워진다. 찰스의 가장 친한 친구인 갤버트는 거주 문제로 아들과 갈등을 겪지만, 둘은 대화를 나누며 아들의 일과 자신의 삶 사이 균형을 찾고자 노력한다.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에 실패하는 것 같아 걱정하는 에밀리에게 "잘하는 사람은 없어. 단지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라고 위로하는 남편의 말은 이 시리즈의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다.
세 번째는 수용 및 포용의 태도다. 실버타운의 입주민들은 더 이상 자신이 젊지 않고,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떠나간 사람들 모두에 감사하며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찰스는 사별로 인한 아픔을 홀로 묵혀두는 대신, 비슷한 상실을 경험한 입주민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진심 어린 경청과 공감 속에서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찰스가 실버타운에서 사귄 친구와 함께 결혼 시절의 추억이 깃든 장소를 여행하는 이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비록 존재는 소멸할지라도 사랑과 기억은 여전히 남아 우리의 삶에 버팀목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든다.
스파이가 된 남자는 나이 듦을 기품 있고 정감 있게 다루며, 노년기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노년에 대한 접촉면을 늘리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시리즈를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