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하루 한 권 읽어요"라는
무심한 방어막

완벽하고 싶은 우리가 상담실 문턱에서 '방어기제'를 꺼내는 이유

by lena
상담실 문이 열리고, 한 아이의 손을 잡은 어머니가 들어오십니다.


직업란에 적힌 '국어 교사'라는 세 글자를 마주하면 반가움보다 먼저 묘한 긴장감이 흐르곤 합니다.

누구보다 아이들을 잘 이해하고 교육 전문가로서 자부심이 강하실 분이, 왜 아이의 독서 습관이나 검사 목적을 묻는 질문에는 "그냥 재밌다고 해서요", "신청서 쓰기 귀찮아서 대충 적었어요"라며 서둘러 펜을 굴리셨을까요.


처음에는 그 무심한 태도가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책은 하루에 한 권 읽는다고 대충 적으시고, 검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재밌다고 해서 왔다"며 가볍게 선을 긋는 모습에서 전문가로서의 허탈함도 느꼈지요.

하지만 상담이 거듭될수록, 그리고 저 또한 퇴근 후 현관문을 열면 '전문가'라는 외투를 벗어던진 한 사람의 엄마가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저는 그녀의 차가운 방어막 뒤에 숨어 '덜덜 떨고 있는 마음'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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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잘하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해서 찾은 곳

전문직 엄마들에게 아이는 때로 나의 유능함을 증명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숙제가 되곤 합니다.

"내가 국어 선생인데 당연히 우리 아이는 언어가 빠르겠지"라는 믿음은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 심리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언어가 약한 아이의 검사 결과를 듣고 "믿을 수 없다"라며 날을 세운 것은 저를 향한 불신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잘하고 있다'라고 믿어온 유일한 기둥이 흔들릴 때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였을 것입니다.


2. 상처받기 싫어서 두른 '무관심'이라는 보호색

진심을 다해 매달렸는데 "당신 아이에게 이런 부족함이 있어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 고통을 감당할 자신이 없을 때 우리는 '무관심'이라는 방패를 선택합니다.

"난 가볍게 온 거야", "대충 적었어"라고 미리 선을 긋는 것은, 혹시 모를 부정적인 결과로부터 내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슬픈 예방주사입니다.

사실 그녀는 누구보다 간절하게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라는 위로를 듣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3. 우리 모두는 때로 '방어적인 엄마'가 됩니다

전문가인 저라고 다를까요.

저 역시 제 아이의 문제를 마주할 때면 연구원이라는 타이틀 뒤로 숨고 싶어 집니다.

타인의 아이에게는 냉철한 분석을 내놓으면서도, 내 아이의 작은 결점 앞에서는 한없이 비겁해지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이지요.

상담실에서 만난 그 어머니의 까칠함은 어쩌면 거울 속 제 모습이었고, 세상 모든 '잘하고 싶은 엄마들'이 가진 공통된 그림자일 것입니다.

저 또한 때로는 제 아이의 약점 앞에서 방어적인 엄마가 되곤 하니까요.


4. 방어적인 어머니(혹은 나)를 마주하는 마음가짐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어머니가 비협조적이고 냉소적일 때, 나는 이제 비난 대신 이런 마음을 품기로 했습니다.


-"지금 이분은 '나 좀 보호해 줘'라고 외치고 있구나": 무례함은 나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 본인의 불안을 감당하지 못해 터져 나온 방어기제일 뿐이다.

-"전문가라는 외투 아래 숨은 '진짜 엄마'를 보자": 겉으로는 완벽한 국어 선생님이지만, 속으로는 "내 아이가 내 기대만큼 되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공포에 짓눌려 있는 한 사람의 엄마를 응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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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가 서로를 돕는 방법

만약 지금 방어적인 태도로 누군가의 조언을 거부하고 있다면, 혹은 그런 내담자를 마주하고 있다면 이렇게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1. 전문가의 '페르소나'를 잠시 내려놓는 '셀프 고백'

상담사인 제가 먼저 "저도 저희 아이 키울 땐 이 수치대로 안 되더라고요"라고 저의 허점을 먼저 고백해 보는 것입니다.

방법: "어머니, 저도 국어 전공이지만 정작 제 아이가 책 읽기 싫어할 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져요. 우리 전문가라는 외투는 잠시 벗어두고, '엄마 대 엄마'로 오늘 이 데이터를 같이 읽어볼까요?"라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2. '정답'이 아닌 '과정의 애씀'에 밑줄 긋기

지능 지수가 몇 점인지보다, 아이를 이 검사실까지 데려오기 위해 어머니가 일상에서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그 '보이지 않는 시간'을 먼저 읽어주어야 합니다.

방법: "신청서를 대충 적으실 만큼 바쁘고 지치신 와중에도, 아이의 잠재력을 확인해주고 싶어 이 자리까지 오신 그 마음이 정말 귀해요. 아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죠."라고 그 정성을 먼저 인정해 주세요.


3. '불편한 진실'을 '성장 가이드'로 치환하기

검사 결과가 부모의 기대와 다를 때, 그것을 '부족함'으로 정의하지 말고 '아이의 사용 설명서'로 부드럽게 바꿔주세요.

방법: "언어 이해가 기대보다 낮게 나온 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완벽하게 이해해야 입을 떼는 신중함' 때문이죠. 어머니처럼 실력 있는 전문가가 옆에서 '틀려도 괜찮다'는 확신만 주신다면, 이 아이의 잠재력은 금방 터져 나올 거예요."라고 부모의 유능감을 자극하는 조언을 건네는 것입니다.


4. '일관성'을 위한 부모의 '자기 돌봄' 권하기

비일관적인 태도는 부모가 나빠서가 아니라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도 휴식이 필요함을 강조해 주세요.

방법: "어머니가 지치시면 아이의 고집을 다 들어주게(허용) 되고, 그러다 화가 나면 갑자기 엄격해지기(처벌) 쉬워요. 아이를 훈육하기 전에, 어머니가 먼저 차 한 잔 마실 에너지를 비축하는 게 이 아이의 지구력을 키우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마치며: 성벽을 허물면 비로소 보이는 아이의 진짜 얼굴

방어의 성벽을 허무는 것은 나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그 성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아이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는 용기입니다.

오늘 상담실을 나선 그 어머니도, 그리고 오늘 밤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며 자책할 저 자신도, 이제는 성벽 위에서 내려와 아이와 따뜻하게 눈을 맞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사랑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