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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Feb 25. 2021

의도(意圖)와 우연(遇然)의 구렁텅이

연상호, 최규석의 『지옥』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과 〈송곳〉의 최규석 만화가가 합작한 작품 〈지옥〉이 최근에 완결되었다. 2020년 7월 16일 〈지옥〉 1권 초판이 발행된 이후, 해가 바뀌어 1월 6일에 〈지옥〉 두 번째 권이 출간된 것이다. 이 두 권으로 〈지옥〉은 마침표를 찍었다. 이 작품은 많은 화제와 함께 시작했다. 〈지옥〉이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여러 출판사에서 〈지옥〉 판권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화려하게 선포하며 출발한 만화이다. 하지만 〈지옥〉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연상호 감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의 초기 작품 〈지옥―두 개의 삶〉(2004)을 떠올리게 될 테니 말이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많은 지점에서 닮았다. 지옥 관련 초기 작품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표정을 날것 그대로 짧은 서사를 통해 옮겨 놓았다면, 지옥 관련 후기 작품은 종교와 믿음 개념을 경유(經由)해 겁 많음과 소심함, 두려움과 긍지 없음에 대해 질문하였다. 연상호 특유의 문제의식이 새롭게 반복된 것이다.


<The Hell part1>(2003)                         <The Hell part2>(2003)                <지옥>(2020~2021)



그럼 우선 〈지옥〉 관련 단편 애니메이션부터 살펴보자. 짧은 단편인 이 만화의 세계관은 이렇다. 천사가 깜짝 등장해 사람들에게 죽게 되는 시간과 운명을 고지(告知)한다. 여기서 운명은 천당과 지옥 중 어느 곳을 가게 될지 천사가 결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편에서 등장하는 두 인물 중, 남자는 지옥에 여자는 천당에 가게 되는 고지를 받는다. 그래서 이 단편 만화에 ‘두 개의 삶’이라는 부제가 붙은 것이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묘사된 여러 장면을 상기한다면 지옥의 여정이 끔찍하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무엇보다도 죽어 본 사람이 없으니, 죽음 ‘이후’의 삶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 이 두려움이 지옥을 만들었으니 두려움은 배가 된다. 그래서 남자는 무섭다. 망설인다. 초조하다. 남자는 그때 결심한다. 천사가 언급해준 운명을 거부하기로 말이다. 그래서 그는 하수구 밑으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쉬지 않고 움직인다. 그는 천사가 정해준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잡힐 때까지 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도망치며 살아가는 삶 역시 지옥이니 그는 불운한 운명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죽거나 살거나 그에게 지금, 이곳은 지옥일 뿐이다.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등 굽은 쥐가 되어 암흑 속을 배회한다. 아이러니한 지옥의 현실이다.


천당에 가야 하는 여자의 운명은 어떠한가. 천당은 좋은 곳으로 받아들여진다. 지옥과는 정반대의 장소이니까. 하지만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감수해야 하고 이생에서 소중했던 기억을 다시는 품고 있을 수 없으니 가슴이 메워온다. 여자는 진정한 행복에 관해 묻는다. 그래서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도망치기로 마음먹는다. 여자는 남자에게 달린다. 하지만 여자의 바람은 무너진다. 남자 친구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여는 순간, 애인은 다른 여성과 섹스를 하고 있다. 애인은 여자가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여자를 찾았던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성욕을 채우기 위해. 이 장면을 목격한 여자는 책상에 놓인 가위로 그들을 찔러 죽인다. 고지를 받을 시간이 다가오자 천사는 어김없이 등장하고, 그녀의 죄를 다시 묻는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등급이 낮아져 지옥에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애인을 비판할 수 있겠지만 천당으로 가게 된다는 고지 자체가 거짓임이 판명되는 순간이다. 고지를 거부한 여자의 선택은 사후적으로 옳았다.


그렇다면 감독은 이 두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이 지옥임을 역설한 것일까.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일까. 기괴하고 흉측한 길이 펼쳐지더라도 지옥의 주인공들처럼 정해진 길을 거부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이들 요소가 얼룩의 형태로 섞여 있지만,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고지식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지옥>을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다양한 가능성 중, 운명을 거부하는 인간의 모습에 눈길이 간다. 연상호 감독이 만들어낸 세계관은 믿음이 전제된 세계이다. 주인공들은 이 세계관에 틈을 내고 비튼다. 섬뜩하고 무섭지만 고지를 거부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특정한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한다. 『얼굴』에서 등장한 ‘정영희’처럼. 〈사이비〉(2013)에 등장한 ‘김민철’처럼. 도덕적이진 못했지만 〈서울역〉에 등장한 ‘석규’처럼. 이러한 문법이 연상호가 만든 캐릭터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공감해서일까. <지옥> 후기 작업을 협업한 만화가 최규석도 천사의 세계관을 비틀어 버린다.



이 만화에서는 괴롭힘을 당하는 한 소년이 등장한다. 짧은 만화이지만 소년에서부터 노년까지의 시간을 다룬다. 소년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분노를 참을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천사가 등장해 소년을 다독여 준다. 힘을 내라고. 버틸 수 있다고. 그들도 각자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소년은 천사의 이 말을 듣고 참고 참는다. 천사를 믿고 또 믿는다. 소년이 더 이상 소년이 될 수 없을 때까지. 그러나 시간은 소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때 노인이 된 소년은 천사의 말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분노한 소년은 “평생 나를 속인 거야!”라고 절규하며 오른손으로 천사를 터뜨린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다. 소년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깨를 숙인 채, 오랜 시간 억눌린 삶을 살았다. 천사의 말을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최규석은 이 만화를 통해 외부에서 작동하는 강력한 세계관에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순간’의 방식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의식이 연상호 감독과 만나, 〈지옥〉을 보다 〈지옥〉답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옥> 1권 286쪽.                                                    <지옥> 2권 290쪽.


앞서 〈지옥―두 개의 삶〉(2003)에서 남자와 여자의 운명을 다루었다고 적었다. 최근에 출판된 〈지옥〉 후기 작품도 두 운명을 다룬다. 정진수 새진리회 의장(1권)과 갓 태어난 아기(2권)의 운명이 그것이다. 두 인물의 공통점은 고지를 받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정진수의 경우 고지를 받은 후 오랜 시간 삶을 살아야 했고, 갓 태어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에 놓인다. 이 차이에서 사람들은 ‘의도(意圖)’에 대해 묻는다. 정확히 말해 고지하는 천사의 의도를 헤아린다. 신은 무슨 이유로 고지를 하는가. 하지만 이 질문 자체가 아이러니다. 이 만화의 세계관에서는 고지는 고지일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지는 우연일 뿐이다.


이 만화의 첫 부분에 적혀 있는 것처럼, “‘고지’는 아무런 예고 없이 무차별적으로 시행”(①:6)되는 재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의도를 셈하고 이유를 만든다. 이 목적에 부응하는 인물이 정진수이다. 그는 없는 의미를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이러한 혼란에 대응하기라도 하듯, 갓 태어난 아기가 고지를 받는 사건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요한다. 의도를 만드는 입장에서, 갓 태어난 아기에게 고지가 떨어지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고지를 받는다는 것은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인데,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의도에는 ‘죄’가 버티고 서 있었는데, 아이에게 ‘죄’가 없으니 그들의 의도는 무용지물이 된다.


<지옥> 2권 277쪽. 


이 서사를 통해 두 예술가는 ‘의도’를 조작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자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생각해봐야 할 것은 ‘고지’ 자체를 거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고지를 받는 순간, 사람들은 거부하지 않았으며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은 했지만 저항하기보다는 고지의 세계관 속에 빨려 들어가 이유를 찾았다. 저항하지 못했으며 소심하게 대응했다. 내 안에서 가능성을 찾기보다는 이유를 만들고 주석을 붙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옥>의 결말은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해결책이 ‘나’와 ‘우리’가 아닌 갓난아기의 희생으로 견고한 세계관에 틈을 벌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해결에 필요한 가능성을 찾았다기보다는 희생의 형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봐야 한다.


<지옥> 후기 작품 2권에서는 고지를 받은 아기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자신의 자식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아이의 부모가 그 인물들이다. 이들은 고지 자체를 받아들였지만, 정진수처럼 고지의 의미를 찾았던 것이 아니라, 고지 자체를 의심했다. 이들의 의심은 ‘고지’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괴물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아이는 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부모의 노력으로 인해 고지의 세계관이 몽땅 허물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고지를 맹목적으로 믿었기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꿈꾸지 못했지만,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책임감과 신념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꿔주었다. 이 만화의 세계관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두 예술가는 고지를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의 심리에 의문을 제기했다. 의도가 아니라 우연일 뿐이라고, 당신의 믿음이 의도를 의도이게 했을 뿐이라고.


<지옥> 2권 289쪽.


연상호와 최규석의 합작품 〈지옥〉은 재난에 불과한 고지를 이용해 “사람들 겁주고 벌줘서 좋은 세상 만들겠다”(②:18)는 믿음이 거짓임을 밝혀주는 작품이다. 고지를 이용해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믿음. 즉, ‘종교’로 번역되는 비유적인 대상들의 탐욕을 그리고 있다. 더 나아가 ‘의도’ 자체를 의심하지 못하는 내 안의 ‘나’를 쳐다보게 한다.


삶에 있어서 주어진 ‘의도’ 같은 것은 없다. 두려움에 떨면서 없는 것을 만들 필요는 더더욱 없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낯선 풍경과 마주해야 한다. 당당하게 긍지를 품으면서 힘차게 걸어가야 한다. 그곳이 지옥이더라도 온몸으로 맞설 때,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연상호와 최규석은 이런 ‘맞짱’의 패기를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연상호가 만들어낸 ‘괴물’이 지나치게 반복된다는 점이다. 반복은 차이를 생성하기에 의미 없다고 할 수 없으나, 괴물의 도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연상호가 시선을 회전해 균열을 낼 수 있는 ‘새로운 괴물’을 만들게 된다면 어떨까. 로지 브라이도티가 언급한 ‘여성-괴물’의 가능성을 고민해 본다면, 그의 문제의식이 좀 더 날카롭게 펼쳐지진 않을까. 다양한 괴물의 변주를 몽상하게 된다.


※ 참고

〈지옥〉 단편

1/4 https://www.youtube.com/watch?v=kPOMiedv63Q&t=32s

2/4 https://www.youtube.com/watch?v=8KIkzQJkJqo&t=488s

3/4 https://www.youtube.com/watch?v=qgWgpEMYyto&t=19s

4/4 https://www.youtube.com/watch?v=Txeo7rfmWzM&t=8s



최규석의 단편 만화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b=bullpen2&id=2345205&m=&qu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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