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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Nov 22. 2022

손경선 시인의 시집 <꽃밭 말씀>에 대한 서평

도약을 위한 세 가지 시선



도약을 위한 세 가지 시선  


2020 1월 20일 국내에 코로나19 첫 환자가 발생한 이후, 지난 몇 년 동안 혼란한 삶을 이어나가야 했다. 누군가는 백신이 개발되면 종식될 거라고 단정했지만, 이런 믿음을 신뢰할 사람은 이제 없다. 코로나19는 평범한 감기처럼, 때론 위협적인 존재로, 우리 곁에 공존할 뿐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코로나19가 삶의 패턴을 바꾸어 놓았다는 데 있다. 지금은 흔하지만 2000년대 초반에 발명된 아이폰이 인간의 삶을 바꾸어 놓은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가 우리들의 익숙한 삶을 현격히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하게 만든 것이다. 살과 살이 닿아야 했던 관계가 물러나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줌이나 메타버스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와 맞물려 곁에 있다는 측면에서 돌봄과 동물권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도 동시에 부각 되었다. 즉, 만남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인간은 곁에서 마주칠 수 있는 다른 존재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다른 말로 말해 ‘곁’에 동물이나 식물을 두게 되니 새로운 대상에게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식물’을 곁에 두고 있다는 측면에서 손경선 시인의 최근 시집 『꽃밭 말씀』도 동시대의 이러한 흐름 속에 함께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인이 오랜 시간 식물을 돌보았기 때문에 꽃이 중요한 소재로 시집에 선택된 것일 수도 있지만 작금의 시대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식물’도 돌보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시집 속에 수록된 작품을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잉된 표현일 수 있으나, 나는 이 부분이 손경선 시인의 시집을 지금 이 시기에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위트있게 말해 ‘가드너’들을 위한 시집이라는 것이다.


큰 틀에서 이 시집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곁에 있는 ‘식물’에 대한 이야기와 잊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사연 그리고 ‘바닥’이라는 소재가 그것이다. 이중 시인이 시집 제목으로 삼은 것은 세 가지 중 ‘꽃’이다. 그만큼 ‘꽃’이라는 소재에 많은 애정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독자들은 반려 식물이라는 면목으로 그의 작품을 소소하게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이러한 판단이 어긋날 수도 있지만, 동시대 시인들이 자신의 시집 속에 반려 동물 이야기를 눈에 띄게 수록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지 이러한 표정으로 인해 과거에 중요시 여기지 않았던 대상이 관심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시인은 식물 곁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가능성을 붙잡았던 것일까. 독자들은 이 지점을 흥미롭게 탐구할 수 있다. 1부에 수록된 23편의 작품 모두 ‘꽃밭 말씀’이라는 부제가 붙는다. ‘꽃’과 관련된 작품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니 독자들은 시인이 꽃 주변을 오래도록 서성거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시인은 가드너로서 꽃 주변을 돌고 돌며 관리하기 위해 애썼고, 이 과정에서 삶의 귀중한 흔적들을 찾아내 시로 조탁한 것이다. 이 여정이 이 시집에 묶였다.


가령, 식물은 결실을 맺고 편히 쉬는데 반해 “인간만이/ 아직도 결실을 찾아 종종 걸음”(「결실-꽃밭 말씀 3」)을 걷는 다는 표현이나, 꽃밭과 꽃을 키우는 과정에서 풀밭도 잡초도 함께 자란다는 사실에 공감하며 “세상 만물이/ 더불어 살아간다”(「공존」-꽃밭 말씀 6)는 소중한 진리를 깨달은 것, 식물이라고 해서 무조건 곧은 햇빛을 쫓는 것이 아님을 모른 채, 앵초를 잃게 된 후 “그늘에 기대어 사는 삶도 있다”(「기대다-꽃밭 말씀 9」)는 것을 알게 된 일 등은 식물을 키우는 과정에서 성찰적인 삶을 운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방식으로 독자도 시인의 삶을 훔쳐보는 과정에서 다양한 의미를 확장하고 증폭할 수 있다.





코끼리 마늘 세 개를 심었다

촉이 올라오자 지표면이 갈라진다

고통스런 대지 산고의 비명을 지른다


품을 뽑는답시고 꽃밭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밟히는 땅과 새싹들이 비명 자욱하다

풀인 줄 알고 뽑고 돌아서니 아끼는 꽃

꽃밭지기의 비명소리 드높다


생명이 싹트고 꽃이 피는 데는

이렇듯 비명소리가 필요하다


오늘 세상 누군가의 비명소리

또 다른 누군가의 웃음꽃으로 피는 것은 아닌가


     「비명소리-꽃밭 말씀23」 전문




시인은 꽃밭에 “백합목 백합과에 속하는 커다란 구근 식물”인 주먹만한 코끼리 마늘(Elephant Garlic) 세 개를 심는다. 그냥 보통 마늘이 아닌, ‘코끼리’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독자는 마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흙 속에 심은 이 마늘이 땅에서 올라오니 지표면은 갈라진다. 시인은 이러한 관경을 쳐다보면서 “고통스런 대지 산고의 비명”이라고 적는다. 시인은 식물의 성장으로 인한 땅의 열림이 산모의 고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비논리이지만, 시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바라보는 과정에서 믿음은 마법처럼 현실이 된다.


즉, 시인은 꽃밭과 풀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식물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갇게 된 것이다. “생명이 싹트고 꽃이 피는 데는/ 이렇듯 비명소리가 필요”하다는 문장을 얻은 후, 비명 후의 기쁨을 셈할 수 있는 것도 온 마음을 다해 식물 곁에서 관심을 내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상상’할 수 있는 시인의 힘인지도 모른다. 진정성을 품은 채, 온전히 상상할 수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순간이니 그렇다. 무엇보다도 시인은 식물과의 이런 교감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무거운 나를 짊어지고/ 앞만 보고 달린 지난 생을”(「과속 방지 턱-바닥 10」) 반성하거나 전적인 가능성은 아니더라도, “때때로 마음만은 불게”(「철부지 꽃-꽃밭 말씀7) 필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그것이다. 이 반성이 ‘나이듦’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 특이한데, 끝을 향한 시인의 응시가 식물의 숨소리를 더욱 더 잘 듣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끝을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은 욕망과 욕심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투명한 마음은 대상에게 온전히 다가갈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된다.


시인이 ‘꽃’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삶의 다양한 흔적을 찾아내 1부에 기록했다면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바닥’을 응시하면서 또 다른 삶의 흔적을 기록한다. 꽃과 관련된 연작시를 쓴 것처럼 21편의 ‘바닥’ 연작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긍정의 힘을 선사한다. 하지만 시인이 운용하는 바닥은 우리가 흔히 ‘바닥’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시인이 응시한 바닥은 수준 낮은 대상이나 초라한 대상이 아니라 가능성의 형태로 머문다. 그에게 있어 바닥은 오히려 더 높이 날기 위한 중요한 디딤돌이자 굳센 다짐의 형태다. 수 백 년 된 나무를 베어 내더라도 다시 새 순을 보이며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언제나 바닥에서”(「시작詩作-바닥 14」) 시작한다. 창공을 나는 새도, 대양을 오가는 배도, 진실을 외면한 거짓도, 얇은 지식의 수준도 “바닥부터 채우고/ 바닥을 쳐야 다시 일어”(「자격-바닥 7」) 난다. 다른 말로 말해 시인에게 있어서 “바닥과 정상은 옛날 옛적부터 친구”(「정상-바닥 12」)인 것이다. 그러니 독자는 시인이 흔한 ‘바닥’ 개념을 어떻게 승화 시키는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 지점이 ‘꽃’을 응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시집을 즐길 수 있는 핵심 포인트다.




누룽지 드셔보셨나요

참 구수합니다


볶음밥 드셔보았지요

눌어붙어 박박 긁은 것이 제일 맛있지요


뜨겁게 달아오를 때

낮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

바닥에 몸을 뉘여

제 몸을 더 뜨겁게 달굴수록

바닥의 맛이 더해집니다


세상의 바닥을 긁을 때

삶도 풍부한 맛을 품습니다


     「맛-바닥6」 전문




‘바닥’ 관련 연작시가 삶의 끝에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니, 일부의 독자들은 다소 칙칙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작품은 그런 편견을 잠시 보류해 준다. 재미 있으니 그렇다. 누룽지나 볶음밥을 먹어 본 사람은 “눌어붙어 박박 긁은” 밥이 맛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뜨겁게 바닥을 달궈주는 과정에서 찐득하게 밥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집이나 식당에서 숟가락으로 힘껏 바닥을 긁는다.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보편적인 사실을 통해 시인은 “세상의 바닥을 긁을 때/ 삶도 풍부한 맛”을 느끼게 된다는 진리를 얻는다. 이처럼 시인의 ‘바닥’ 관련 연작시를 읽고 있으면 ‘바닥’이어도 괜찮다는 무언의 위로를 받는다. ‘바닥’에 머무르는 것이 마냥 좋지는 않겠지만, 시인의의 말처럼 ‘바닥’이야말로 다시 도약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칼날 위가/ 춤추는 바닥”(「춤판-바닥」)이며 “오랫동안/ 바닥에 앉아 있던 새만이/ 오랫동안/ 하늘을 가로질러 힘차게”(「조건-바닥19」) 날 수 있다. 누군가는 ‘바닥’과 같은 삶이 어떻게 현실에서 상승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현실을 만만하게 볼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닥’이 꼭 자본이나 물질의 행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정신적인 영혼의 형태도 바닥과 함께 논할 수 있다. 그러니 바닥에서의 삶이 우리를 보다 더 나은 삶 속으로 견인한다고 봐야 한다.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이 시집에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다룬다. 어머니와 관련된 연작시를 쓰지 않았지만 어머니에 대한 흔적을 시집 2부에 숨겨 놓았다. 그 과정에서 어느덧 자신도 부모의 입장이 되었으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후회의 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른이 되는 것을 의미하고 지난 시절에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니 그렇다. 시인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아버지를 알게 되고 아버지가 되는 나무”(「가족」)를 경험해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에게 엄마는 소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엄마를 불러보면 입가에 맴돈다. “맴돌다 오는 말”, “맴도다 가는 말”(「동백의 헌신」)이 엄마다. “제 소유의 땅을 디딘 적 없지만/ 평생 흙만을 믿고”(「바랭이」) 따른 정직한 사람이다. 말년에 정성껏 “한 뙈기 자갈밭”(「꽃자리」)을 얻을 수 있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감나무 꼭지처럼 화자를 정성껏 돌봐주셨다. 억세게 삶을 살아 내기도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에게서는 늘 짠내가 항상 풀풀 났다고 시인은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도 땀방울이 마르지 않으셨던 것일까. “무덤에는 함초가”(「냄새」) 자랐다는 표현이 애절하게 느껴진다. 함초는 소금기를 먹고 살아가는 약재류라는 점에서 생전의 엄마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어머니가 사시는 땅

내가 살고 있는 땅

그 사이 바다


사람과 사람 사이 바다

고향과 타향 사이 바다

간절함과 절실함 사이 바다


해를 삼키고

바람을 일으키는 어머니의 눈물바다


가장 먼 곳과

가장 가까운 곳 사이의 거리만큼 멀다


온갖 풍랑을 쓸어 담은

어머니 가슴 깊이만큼 깊다


촛불기둥 세워서 기도의 탑으로

연결할 만큼이다


      「연육교-원산안면대교를 보며」 전문




시인은 원산안면대교를 보며 이 작품을 썼다. 화자는 이 지명을 “이미 육지와 연결된 안면도와 보령의 원산도를 잇는 다리”라고 적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읽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시인의 어머니는 섬에 사셨고 시인은 섬을 나와 생활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엄마와 화자의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독자는 짐작할 수 있다. 섬을 나온다는 것은 굳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흙이 아닌 육지로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두 번 다시 섬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와 무관하지 않다. 시인의 이러한 마음은 오랜 시간 섬에서 머무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머니와 ‘화자’의 관계는 더 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멀어졌다는 것은 실직적인 거리가 아닌, 다 큰 자식이 부모 곁을 떠나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리다. 그러니 시인은 엄마가 늘 항상 이렇게 그립니다. “하늘로 돌아가 별이 되신 어머니”(「페르셰유스 유성우」)가 그렇게 보고 싶다. “‘맛난 것을 보면 너 땜시 목에 걸린다’”던 “생전 어머니의 말씀”(「목에 걸린다」) 잊을 수 없다. “거기서 태어나/ 거기를 떠났지만/ 아직 나의 일부는/ 거기 머물러”(「거기, 고향」) 있기에 육지와 섬을, 섬과 섬을 잇는 다리를 응시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니라.


이상으로 이 시집에서 다뤄지고 있는 세 가지 요소 ‘어머니’, ‘바닥’, ‘꽃’을 소재로 시인이 어떻게 시를 형상화 내고 있는지 확인하였다. 잠시 멈춘 채, 시인의 여정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다 보니 그는 무엇인가를 새롭게 도전하려는 듯하다. 도전이 다소 자극적이라면 도약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표현해도 좋다. 여기서 도약은 과거의 습관을 잠시 밀어두고 새로운 습관을 몸속에 축적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바닥’ 관련시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그가 생각하는 바닥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시집에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이 시집이 출간된 이후, 그는 자신만의 바닥을 찾아 ‘나’를 성장시킬 것 같다. 동시에 ‘꽃’과 관련 작품들은 반성의 형식으로 이곳의 삶을 응시하게 만든다. 시인이 지금, 이 순간을 반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가능케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어머니와 마찬가지고 지금 현재 끝을 응시한다. 나이듦은 뜨거운 온도에 희망을 걸기 보다는 적적한 온도에서도 가능성을 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앞서 논의된 ‘바닥’과 ‘꽃’ 연작시가 정서적인 측면에 도움을 주어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리듬이 펼쳐질 것 같다.


무엇보다도 시인은 엄마를 생각하면서 삶과 죽음을 냉철히 응시한다. “등과 허리에오름을 가득 지고 서 있는”(「꽃 피우지 않는 나무」) 엄마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엄마는 이처럼 이 계절에 안 계셔도 시인에게 힘을 주는 존재다. 시인에게 ‘엄마’는 ‘바닥’이나 ‘꽃’과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결국, 시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를 온전히 쳐다보기 위해 오늘을 사는 셈이다. ‘나’를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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